[동아일보 100주년 기획 / 극과 극이 만나다] 독일서 유학 중인 김선희 씨 “獨선 여성 배려, 이사 30% 할당… 한국도 변해야” 서울서 대학 다니는 황두남 씨 “여자 동기 능력, 남자 앞서기도… 인사 특혜 곤란”
‘아이 돌보고 집안일 하는 가정주부.’
다니던 국내 대학을 관두고 독일로 건너가 3년째 유학 중인 김선희 씨(24)가 한국에서 느꼈던 여성상은 이랬다. 하지만 베를린의 한 글로벌 콘텐츠 기업에서 인턴으로 일하며 선희는 전혀 다른 세상을 봤다. 독일은 주요 상장기업 이사회의 30% 이상을 여성에게 할당하도록 하고 있다. 실제 남성과 여성은 동등한 조건에서 경쟁했다. 회사에서 여성이사들과 함께 일하는 선희는 한국도 제도적 뒷받침이 사회의 변화를 이끌 거라고 믿는다.
독일 베를린에서 인턴십을 하고 있는 김선희 씨(왼쪽 사진)와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는 황두남 씨가 18일 오후 6시(한국 시간) 화상대화 프로그램을 통해 만나 함께 셀카를 찍고 있다. 스물넷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여성이사 의무할당제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눈 뒤 “언젠간 굳이 배려가 없어도 남녀가 평등하게 꿈을 펼치는 세상이 오면 좋겠다”고 입을 모았다. 김선희·황두남 씨 제공
생각도 환경도 서로 다른 선희와 두남. 정치·사회 성향조사에서도 선희는 진보에서 6번째, 두남은 보수에서 첫 번째란 결과를 받았다. 격차는 8122km란 서울과 베를린의 거리만큼이나 동떨어져 있었다.
두 사람은 18일 화상대화 프로그램을 통해 ‘언택트’(비대면 접촉) 방식으로 서로를 마주했다. 서머타임을 적용해도 시차가 7시간이 나는 각자의 세상에서 스물넷 동갑내기는 1시간 반 동안 진지하게 자신의 의견을 드러냈다. 대화를 끝낸 뒤 각자의 소회를 일기 형태로 재구성했다.
○ 선희의 다이어리=10월 18일 베를린 맑음
일요일 오전 11시. 화면으로나마 서울 밤공기를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오랜만에 한국에 있는 친구랑 얘기를 나눌 수 있어서 더 그랬던 건지도.
독일에 온 지 3년 남짓. 여기선 남녀의 ‘성 역할’이라는 고정관념이 아예 없다. 남녀가 똑같이 육아휴가를 나눠 쓴다. 육아휴가 탓에 경력 단절이 생긴다는 생각 자체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여성이사 의무할당제를 강력하게 시행 중이다. 독일인 동료들도 이 제도를 계기로 다양한 직위와 직군에서 남녀가 함께 일하게 되며 기업 성장에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두남이 이 제도를 ‘역차별’이라 부르는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건 불평등을 바로잡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일 뿐이다. 한국 대형 상장기업의 등기이사는 100명 가운데 95명이 남성 아닌가. 이 숫자를 보고도 차별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떤 조직이든 그 안에 30% 정도는 소수집단이 있어야 기존 조직 문화를 바꿀 수 있다는 하버드대의 연구 결과가 있다. 여성 결정권자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조직에서 어떤 자연스러운 변화가 일어나길 기대하긴 어렵다.
물론 두남이 내 주장에 무조건 반대한 건 아니다. 그는 제도 도입에 따른 부작용과 갈등을 걱정했다. 나 역시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려면 제대로 된 육아휴가 제도와 공정한 평가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는 두남의 이야기에 크게 공감했다. ‘싸우기’보다는 ‘바꾸기’ 위한 논의라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대화를 시작하기 전엔 행여 서로 얼굴만 붉히다 끝나는 게 아닐까 걱정이 컸다. 하지만 막상 노트북 화면에서 마주한 우리는 서로 존중하며 대화했다. 한쪽에게 무작정 특권을 주는 게 아닌, ‘함께 잘 살자’가 이번 논의의 출발점이라는 것에 동의했다. 언젠가 두남이 베를린에 온다면 맥주라도 한잔 마시며 더 많은 얘길 나눌 수 있을 거 같다.
○ 두남의 일기=10월 18일 서울 쾌청
일요일 오후 6시. 화면 속에 비친 베를린의 햇살이 무척 따사로워 보였다. 일상의 무료함도 감사해야 하는 시대. 처음 만난 선희가 들려준 독일 생활의 경험이 더 신선하게 다가왔다.
어문학을 전공한 나에겐 여성 동기와 선후배들이 많다. 그만큼 ‘여성 직장인의 삶’을 곁에서 많이 지켜봐 왔다. 함께 학교를 다닌 그들은 현재 대부분 좋은 직장에 들어가 열심히 일하고 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여성 친구들과 함께 공부했지만, 남성인 내가 유리하거나 더 뛰어나단 생각은 한 적이 없다. 오히려 같은 조건에서 경쟁할 때 남성들이 밀린단 인상을 받는 일도 잦았다.
‘역차별’ 우려도 있다. 한국 사회에 차별이 사라졌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다만 이 제도 때문에 남성이란 이유로 배제되는 사람이 있다는 건 공정하지 않다. 능력 있는 인재를 적재적소에 자유로이 배치해 수익을 창출하는 기업의 목표에도 반한다. 의무할당제를 통해 이사가 된 여성이 조직에서 당당하게 일할 수 있을까. 또 다른 차별을 야기해 갈등만 증폭시킬까 걱정스럽다.
아직 사회 경력이 부족한 선희나 나나 사회의 민낯을 안다고 말하긴 어렵다. 출산이나 육아와 같은 장애물을 직접 맞닥뜨려 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여성들이 부딪히는 장애물을 없애기 위해서는 의무할당제보다 더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 성차별이 남아 있다면 기업에 제도를 강제하기에 앞서 충분한 인식 개선의 과정을 먼저 거쳐야 한다.
선희는 나와 생각이 달랐지만 그 말에는 하나하나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는 의무할당제가 도입되면 많은 남성들이 박탈감을 느낄 수 있다는 내 의견에 공감해줬다. 여성이 직장에서도 남성과 같은 역할과 위치에 설 수 있다면 그건 남녀 모두에게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킬 거란 선희의 말은 잊혀지지 않는다.
지금은 느끼지 못한다고 해도, 내 대학 동기들 역시 시간이 흐르면 이전 세대처럼 유리 천장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선희와 나처럼 함께 고민하는 청년들이 늘어난다면 제도 없이도 남녀가 평등한 세상이 오지 않을까. 베를린에 오면 맥주를 사겠다던 선희. 서울에서 ‘차고 쓴 소주’ 한잔 기울여도 좋을 것 같다.
▼ 시민 제안자들 “평등-공정 얘기해봤으면…” ▼
성향조사 사이트에 300여명 참여, 남북관계-주한미군 등 주제 제시
양극이 한자리에 마주 앉는 무대. 동아일보 창간 100주년 기획 ‘극과 극이 만나다’는 4회까지 지역, 세대, 인권, 젠더(gender·성) 등의 분야에서 시민이 참여하는 대화를 진행했다. 현재까지 극과 극이 만나다 무대에 오른 참여자는 24명. 총 12차례 1 대 1 대화가 이뤄졌다.
지금까지 극과 극이 만나다의 성향조사 사이트(dongatest.donga.com)에 의견을 남긴 참여자는 300여 명. 이들은 생각이 다른 이와 나누고 싶은 대화 주제를 적극 제안하기도 했다.
시민 상당수는 ‘평등’이나 ‘공정’ 등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근본적인 가치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싶어했다. 이모 씨는 “평등한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은 인간을 존중한다면 당연한 책무라 생각하는데 이러한 가치를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분과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고 적었다. 반대로 배모 씨는 “경쟁사회를 지양하고 평등만 추구하는 분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고 썼다. 용모 씨는 “정의나 공정이라는 가치가 기준과 원칙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보면서 의견이 다른 이와 대화하고 싶다고 느꼈다”고 했다.
한국 사회의 특정 현안을 대화 주제로 제시한 시민들도 적지 않았다. 남북관계, 주한미군 철수, 탈(脫)원자력발전소 정책, 사형제도 폐지 등이 대표적이다. 또 환경오염, 기후변화 문제를 놓고 상대방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의견도 상당했다.
특별취재팀 dongatalk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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