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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도 약 못 먹는 시각장애인들[현장에서/김소영]

입력 | 2020-11-04 03:00:00


올바른 의약품 점자 표기는 시각장애인들의 약물 오남용을 막을 수 있다. 동아일보DB

김소영 사회부 기자

“ㅍ ; ㅋ.”

지난달 30일 서울 관악구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 시각장애인 류재훈 씨(35)는 감기약 ‘판△’의 포장용기에 적힌 점자를 이렇게 읽었다. 류 씨는 “점자의 높이와 간격이 표준 규격에 맞아야 읽을 수 있다. 이 점자는 무슨 글자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는 20분 넘게 애썼지만 결국 고개를 저었다.

점자를 읽기 힘든 의약품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점역교정사(일반 문자를 점자로 번역하고 교정하는 사람) 자격증이 있는 류 씨와 제품 10개를 확인했다. 절반 이상 무슨 약인지 알 수 없었다.

한 유명 연고도 마찬가지였다. 류 씨는 “높이가 너무 낮아 무슨 약인지 알고 읽어도 어렵다”며 갸우뚱했다. 한 진통제는 점자 위에 가격표를 붙여 한글인지 영문인지도 구분이 힘들었다.

아예 점자 표기가 없는 의약품도 상당하다. 시각장애인 조현영 씨(40)는 올해 초 화장실 세면대에 부딪쳐 눈 주위를 크게 다쳤다. 조 씨는 “피가 나서 구급상자를 열었지만 점자 표기가 없어 반창고를 찾지 못했다”고 했다. 지난해 한국소비자원 조사에 따르면 조사 대상인 58개 의약품 가운데 42개(약 72%)에 점자가 없었다.

이런 상황은 위험한 상황을 초래하기도 한다. 시각장애인 A 씨(42)는 “아들이 세 살 때 열이 났는데 해열제 대신 멀미약을 먹일 뻔한 적이 있다”고 속상해했다. A 씨는 머리가 아파 두통약을 먹었는데 알고 보니 소화제였던 경험도 있다.

제조사 측은 “미처 시각장애인들의 불편을 인지하지 못했다”며 개선을 약속했다. 식품의약품안전처 관계자는 “점자 위에 가격 스티커가 붙어 인식에 어려움이 생기는 일이 없도록 대한약사회에 협조를 요청하겠다”고 했다.

제약회사나 약사만 탓할 일은 아니다. 현행 약사법상 의약품 점자 표기는 의무가 아니다. ‘의약품 등의 안전에 대한 규칙’에서 권고만 하고 있다. 19, 20대 국회에서 점자 표기 의무화를 담은 약사법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국회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현재 21대 국회에서 시각장애인인 국민의힘 김예지 의원이 대표로 개정안을 발의한 상태다.

해외는 어떨까. 유럽연합(EU)은 점자 표기 의무화뿐 아니라 표준 규격도 잘 지켜 약물 오남용을 줄인다. 이연주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정책팀장은 “제대로 된 점자 표기는 장애인 복지의 궁극적 목표인 ‘자립’과 이어진다”며 “장애인이 독립적 인격체로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중요한 일”이라고 했다.

4일은 ‘점자의 날’이다. ‘시각장애인의 세종대왕’이라 불리는 송암 박두성 선생(1888∼1963)이 1926년 한글 점자를 창안해 반포했던 날이다. 몸이 아프면 약을 꺼내 먹는 평범한 일이 시각장애인에게도 ‘일상’이 되도록 한 번 더 돌아보고 제도를 보완할 때다.


김소영 사회부 기자 ks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