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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변과 억지의 ‘언어 파괴 정치’[오늘과 내일/정연욱]

입력 | 2020-11-10 03:00:00

與, 일방적 ‘편 가르기’로 개혁명분 왜곡
국민 눈높이 어긋난 정치 메시지는 공허




정연욱 논설위원

“저 자신부터 기득권을 내려놓고 ‘육참골단(肉斬骨斷)’의 각오로 임하겠다.”

2015년 야당 대표 시절 문재인 대통령이 당 혁신을 위해 던진 화두였다. ‘육참골단’은 스스로 살을 베어내면서 상대방의 뼈를 끊어낸다는 일본 무사들의 필살기를 뜻하는 말이다. 당시 당 혁신위원이었던 조국이 근본적인 당 쇄신을 촉구하면서 사용한 표현에 화답한 것이었다.

개혁은 이처럼 선도적 자기희생을 추진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 김영삼 정부 개혁의 상징인 공직자 재산공개도 여권 내부가 1차 표적이 됐고, 그 홍역을 거치면서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됐다. 대통령의 ‘밀실인사’ ‘코드인사’ 남용을 막기 위해 김대중 정부에서 처음 도입된 국회 인사청문회는 노무현 정부 들어 대상자가 장관들까지 확대됐다. 후보자들에 대한 과도한 신상 털기와 잇단 낙마에도 불구하고 공직자 청문이라는 시대적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다. 마케팅 법칙 중에서 ‘얻기 위해선 포기해야 한다’는 희생의 법칙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5년 전 ‘육참골단’의 결기로 태어난 것이 최근 전(全)당원투표를 거쳐 폐기된 여당의 당헌이었다. 선출직 공직자가 중대한 잘못으로 그 직위를 상실해 재·보궐선거를 실시할 경우 무공천한다는 조문(당헌 96조 2항)이다. 내년 4월 보궐선거는 여당 소속 시장들의 성추문이 원인을 제공한 것이 분명한데도 여당 지도부가 그 책임을 회피한 것이다. 선거를 핑계 삼아 상대방을 무너뜨리겠다는 ‘골단’만 번득일 뿐, 내부의 폐습에 책임을 지겠다는 ‘육참’의 결기는 찾아볼 수 없다. 개혁의 대의가 자파(自派)의 이익만 챙기고, 남 탓만 하면서 공격하는 의미로 변질된 것이다.

한 여당 의원은 당헌 개정이 끝나자마자 “국민들도 이미 시장 후보 다 낼 거라고 알고 있지 않았느냐”고 우긴다. 선거만 있으면 과거 약속은 언제든지 뒤집어도 없던 일이 된다는 억지이자 궤변이다. 이런 식이면 앞으로 어떤 혁신안을 내놓더라도 국민들의 마음을 사기는 어려울 것이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인사권, 수사지휘권, 감찰권 남용은 새삼 거론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다. 자신과 여권을 향한 공세는 싹 자르기 바쁘고, 윤석열 검찰 공격이라면 의혹 제기 수준이라고 해도 주저하지 않고 있다. 급기야 윤석열 검찰의 특수활동비 집행내역을 감찰하겠다고 포문을 열었지만 추미애 법무부의 특활비 내역은 손도 대지 않는다. 뒤늦게 야당 요구로 법무부 특활비 조사도 이뤄졌다. 이래 놓고서 ‘기승전-검찰개혁’을 외치니 검찰개혁이 ‘그들만의 개혁’이라는 조롱을 받는 것이다.

감사원 감사를 통해 월성 1호기 원전 조기 폐쇄 과정에서 경제성 평가를 조작·은폐한 정황이 드러났는데도 산업통상자원부는 ‘적극 행정’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일요일 심야에 도둑처럼 사무실에 들어가서 컴퓨터에 있는 444개 파일을 삭제한 것이 면책 사유가 되는 적극 행정이란 말인가. 위계질서가 엄격한 공직사회에서 이런 억지주장을 하려면 감사원보다 더 센 뒷배를 믿었을 것이다.

여권이 내걸고 있는 구호는 대개 선의(善意)나 착한 이미지로 포장돼 있다. 개혁과 정의, 공정, 민주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구호만 그럴듯할 뿐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참뜻은 일그러지고 있다. 중국의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들은 “이것이 진짜 민주주의”라고 외쳤고, 마오쩌둥 정부도 프랑스 대혁명의 중국판 버전으로 선전했지만 ‘마오 정적 숙청’이라는 엄연한 사실까지 덮을 순 없었다. 정치적 구호나 발언이 국민의 눈높이에 부합하지 않으면 정치적 메시지는 공허해질 뿐이다.

정연욱 논설위원 jyw1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