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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 장관들의 무책임한 ‘책임 선언’[문병기 기자의 청와대 풍향계]

입력 | 2020-11-10 03:00:00


문재인 대통령이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오른쪽)과 함께 9월 10일 청와대에서 열린 제8차 비상경제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병기 기자

“한두 번 있었던 일도 아니고….”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주식양도세 부과 대상 대주주 기준을 10억 원에서 3억 원으로 낮추려던 정부안 무산에 “책임을 지겠다”며 돌연 사의를 표명한 3일, 청와대 한 관계자는 이 같은 반응을 보였다. 국무위원인 장관, 특히 문재인 대통령이 수차례 ‘경제수장’이라고 못 박은 경제부총리가 공개적으로 사의를 표명한 데 대한 반응치고는 싸늘하다 못해 냉소적인 수준이다. 또 다른 관계자는 “대통령이 교체하지 않을 것을 알고 본인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사의 표명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힌 것 아니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여권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대통령이 세 차례나 재신임 의사를 밝히면서 홍 부총리를 붙잡는 모양새를 취하고도 홍 부총리는 야당으로부터 “정치쇼 아니냐”는 역공을 받았다. 어차피 교체되지 않을 것을 알고도 예산안 삭감을 벼르는 야당의 공세를 무마하기 위해 ‘사의 표명쇼’를 벌인 것 아니냐는 얘기다.

홍 부총리가 비장하게 “내가 책임을 지겠다”며 직을 내던지고도 별다른 공감을 얻지 못한 것은 어찌 보면 납득할 만한 면이 있다. 올 하반기부터 국회가 열릴 때마다 책임지지 못할 ‘책임 선언’을 하는 장관들이 부쩍 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8월 31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선 임대차 3법에 대한 우려를 쏟아내는 야당 의원들의 질의에 홍 부총리가 “필요한 책임이 있다면 언제든 질 의향이 있다”고 했고, 곧이어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도 “하시라도 책임질 자세가 돼 있다”고 했다.

경제수장과 주무부처 장관이 한목소리로 직(職)을 걸었지만 임대차 3법이 통과되고 두 달여 만에 전세난이 악화되는 등 부작용이 쏟아지고 있는데도 이들이 약속한 책임은 온데간데없다. 오히려 홍 부총리는 6일 전세시장 안정화 대책을 묻는 야당 의원들의 질의에 “확실한 대책이 있으면 정부가 했겠죠”라며 태연한 태도를 보였고, 김 장관은 9일 국회 예결특위에서 “최근 전세의 어려움에 대해선 여러 요인이 있지만 ‘계약갱신요구권 때문이다, 임대차 3법 때문이다’라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정작 책임을 져야 할 정책의 결과를 두고는 발을 빼는 모습을 보인 셈이다. 그러다 보니 장관들의 반복되는 책임 선언은 ‘직을 걸 테니 믿어 달라’는 비장한 의지의 표현이라기보다는 ‘내가 맞으니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무책임한 정치적 엄포나 다름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일각에선 장관들의 무책임한 ‘책임 선언’을 두고 한번 쓴 사람은 쉽게 교체하지 않는 문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 때문이라는 말도 나온다. 집권 4년 차가 마무리되는 지금까지 설화와 논란을 일으킨 장관들은 적지 않았지만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제외하면 이들 대부분은 2년 안팎의 임기를 채웠다. 상벌과 진퇴가 분명치 않다 보니 장관들이 느끼는 책임의 무게가 너무 가벼워진 것 아니냐는 것이다.

하지만 집권 4년 차를 넘어선 올 하반기 들어 유독 ‘직’을 내거는 장관들이 늘어나는 것을 인사 스타일 문제로만 돌리기 어렵다는 분석도 나온다. 4월 총선 대승 이후 청와대와 여당은 “이번 국회가 처음이자 마지막 입법 국회”라는 판단으로 추진하는 법안마다 배수진을 치고 있다. 청와대와 여당이 매번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절박감으로 이른바 민생·개혁 법안을 밀어붙이는 상황에서 장관들은 ‘책임을 지고’ 야당의 공세에 방어막을 치거나 청와대와 여당의 드라이브에 밀리다 ‘책임 표명’으로 자존심을 세우는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은 4일 국회 운영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연말 개각에 대해 “다양한 검토를 하고 있다”고 했다. 청와대 안팎에선 국회에서 직을 내건 장관들 상당수가 개각의 대상으로 거론된다. 하지만 사람만 바뀐다고 ‘책임 공백’이 해결될지는 미지수다. 개혁의 결과보다는 개혁의 의도를 더 중시하는 기조가 계속되는 한 청와대와 여당에 책임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