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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과 놀자!/피플 in 뉴스]퇴진 압박 받는 태국 총리

입력 | 2020-11-11 03:00:00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화려한 베르사유 궁전을 짓고 그곳에서 ‘짐이 곧 국가’라고 믿었습니다. 당시 군주(왕)는 신이 부여한 불가침의 절대 권력을 누렸습니다. 영국의 사회계약론자 존 로크는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켜주지 못하는 정부는 재구성되어야 한다며 저항권의 근거를 밝혔습니다. 사회계약설과 계몽사상으로 무장한 시민계급의 성장과 함께 왕권은 제한되고 의회 권력은 강해졌습니다. 그 타협의 산물로 입헌군주제와 의원내각제가 탄생했습니다. 현대 국가에서도 입헌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가 많습니다. 영국, 스페인, 네덜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벨기에, 일본, 캄보디아, 태국 등이 대표적입니다. 입헌군주제 국가에서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상징적 존재에 불과합니다. 의회 다수당에서 선출된 총리가 행정부를 이끌어 갑니다.

입헌군주제 국가 태국에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석 달 넘게 계속되고 있습니다. 7월부터 시위대는 세 손가락 경례를 하며 저항하고 있습니다. 세 손가락을 들어 경례하는 장면은 프랜시스 로런스 감독의 영화 ‘헝거 게임’에 나옵니다. 기존 질서에 저항하는 주인공을 지지하는 상징 행위입니다. 대규모 시위 과정에서 시위대와 경찰의 물리적 충돌로 인명 피해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태국에서의 반정부 시위는 올 2월 정부 비판적 성향의 야당 ‘퓨처포워드당(FFP)’이 강제 해산되면서 시작됐습니다. 게다가 마하 와치랄롱꼰 국왕의 방탕한 왕실 재정 지출 문제가 드러나면서 태국 청년들의 분노는 들끓었습니다. 10∼30대의 젊은 층을 주축으로 한 시위대는 쁘라윳 짠오차 총리(사진)의 퇴진과 왕실 개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왕실 개혁을 요구하는 것은 태국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입헌군주국 태국에서 국왕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라 왕실 관련 부정적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헌법적 금기입니다. 태국 헌법에는 ‘국왕은 존엄한 지위에 있으며 어떠한 사람도 모독할 수 없고 그 어떤 사람도 어떤 방법으로도 국왕을 비난하거나 고발할 수 없다’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형법에는 ‘국왕 왕비 왕세자를 비방하거나 위협한 자에게는 최하 3년에서 최고 15년의 징역형을 선고할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정부 시위대는 군주제 개혁을 직접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군주제 개혁 10대 요구안을 내걸고 왕실모독죄와 왕실재산법 폐지, 표현의 자유를 외칩니다. 태국 국왕은 즉위 후 400억 달러로 추산되는 왕실 재산을 사유화했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국민들은 고통받고 있는데 왕실의 흥청망청은 도를 넘었다고 생각한 청년들이 저항의 목소리를 높인 겁니다.

이런 가운데 태국 국왕의 화해 제스처가 나와 눈길을 끕니다. 와치랄롱꼰 국왕은 이달 1일 해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들도 똑같이 사랑한다”면서 “태국은 타협의 땅”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발언 뒤 태국 법원은 군주제 개혁 요구를 가장 먼저 주장한 인권변호사 아논 남빠를 석방했습니다.

쁘라윳 총리는 여전히 사퇴 불가 입장이지만, 야당과 시민사회의 참여를 포함한 화해위원회 구성을 놓고 협상이 오가고 있습니다. 국민들의 정치 개혁 요구를 군부와 왕실이 어떻게 수렴하느냐에 따라 태국의 미래가 결정됩니다. 유혈 사태 없이 돌파구가 마련되기를 기대합니다.

박인호 용인한국외대부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