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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덕 칼럼]독재자를 몰아내는 법

입력 | 2020-11-12 03:00:00

“트럼프는 푸틴이 발탁한 스파이”
러시아 美대선 개입 힘입어 당선돼
김경수의 댓글 선거 개입은 무죄
사법부는 또박또박 할 일 하고 있나




김순덕 대기자

4년 전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이 확실해지자 멜라니아는 울었다고 했다. 대통령 취임 전후 1년 반을 백악관 벽에 붙은 파리처럼 지켜보고 썼다는 마이클 울프의 ‘화염과 분노’에 나오는 얘기다. 기쁨의 눈물이 아니었다. 질 줄 알았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물론이고 아들, 딸, 사위, 참모 등 선거캠프의 모두가 대통령 당선을 원치 않았다는 대목은 웃기기보다 섬뜩하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남자가 돼 트럼프타워의 브랜드 값을 비싸게 받으려고 출마했고 패배하면 “선거를 도둑맞았다!”며 지금처럼 화염과 분노를 내뿜을 작정이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유명세를 노린 황당 후보가 미스터트롯식의 경선에서 경쟁자 열여섯 명을 누르고 국민의힘 공천까지 받아 대통령이 돼버린 셈이다.

트럼프도, 멜라니아도 재선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지금, 뒤늦은 의문을 떨칠 수 없다. 만약 러시아가 2016년 대선에 개입하지 않았어도 대통령이 됐을까.

러시아 정부가 트럼프 당선을 위해 정보 조작의 사이버전을 벌였다는 ‘러시아 게이트’는 음모론이 아니다. 대선 두 달 뒤 미국 정보당국이 합동조사 결과 “푸틴이 지시한 것으로 판단한다”고 발표했다. 푸틴 역시 2018년 헬싱키 정상회담에서 “트럼프의 승리를 바랐다”며 “러시아 국가는 개입하지 않았다”는 말로 국가 차원이 아닌 개입을 시사했다. 로버트 뮬러 특검 역시 지난해 의회 청문회에서 이 사실을 확인했다.

물론 트럼프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의 첫 국무장관 렉스 틸러슨은 전 중앙정보국장 권한 대행에게 “푸틴이 트럼프를 본인도 모르게 러시아 스파이로 발탁했다”고 확언한 바 있다. 나중에 보니 본인도 알고 있는 것 같더라고 티머시 스나이더 예일대 교수는 ‘가짜 민주주의가 온다’에 소개했다.

소련의 옛 정보기관 KGB는 1980년대 초부터 해외로 국고를 빼돌렸고 푸틴도 그중 하나였다고 한다. 돈세탁하는 데는 부동산 개발이 적격이다. 트럼프는 1987년 이들을 만나 파산상태에서 벗어났고 재벌로 행세했으며 심지어 대통령이 됐다. 그러나 민주주의 규범을 외면하고 야당을 적으로 보는 독재자가 돼선 러시아의 국익만 들어줄 판이었다.

KGB 출신 푸틴이 미국 대통령을 만드는 한, 소련은 죽었다고 할 수 없다. 사람들이 투표를 못 믿으면 민주주의는 죽는다. 미국의 공작 때문에 소련이 붕괴했다고 믿는 푸틴으로선 트럼프를 이용해 미국 민주주의를 죽이는 복수에 성공한 거다. 서구에 핍박받아온 순결한 러시아를 지키는 차르가 마침내 자유세계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형국이다.

러시아의 선거 개입은 적대국에 의한 불법 침략행위여서 차라리 낫다. 2017년 대선 때 김경수 경남지사는 자국민을 대상으로 정보조작 댓글 공작을 벌이고도 최근 2심에서 선거법 위반 혐의에 무죄 선고를 받았다. 드루킹의 댓글 조작 규모가 특검이 파악한 것만 8840만 회다. 전임 정부 때 국정원 댓글 41만 회의 수백 배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 러시아가 날린 트윗 300만 개의 수십 배를 넘는다면 대체 제 국민을 뭘로 봤다는 건가.

재판부는 김경수가 드루킹 측에 일본 센다이 총영사직을 제안한 것이 “대선 기간 문재인 후보의 선거운동을 지원한 것 등에 대한 보답 내지 대가”라고 분명히 인정했다. “선거 국면에서 특정 정당이나 후보자에게 유리한 여론을 유도할 목적으로 댓글 조작이 이뤄졌다는 점에서 중대한 범죄행위”라면서도 무죄라는 판단은 납득하기 어렵다. 우리나라 민주주의에 대한 모독이고, 다음 대선에서 또 같은 범죄를 벌이라는 소리다.

그래도 미국은 실수에서 배우는 교정 능력이 있는 나라다. 러시아에 대한 강력한 제재를 마련하자 트럼프는 불평을 하면서도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 게이트 수사가 합당한지 감찰하라는 트럼프 지시에 법무부는 작년 말 “정당했다”는 보고서를 내놨다.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는 트럼프가 보수 우세인 연방대법원까지 소송전을 끌고 간대도 뒤집힐 가능성은 적다는 분석도 나온다.

민주주의 규범을 무시하고, 야당을 적으로 아는 것은 이 나라 대통령도 다르지 않다. 선거로 정권을 교체하려면 또박또박 제자리에서 할 일을 다 하는 공직자와 사법부가 필요하다. 지금 우리에겐 월성원전 1호기 폐쇄 관련 7000여 장의 자료를 검찰에 넘긴 감사원장이 있고 ‘살아있는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는 검찰총장이 있다.

 
김순덕 대기자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