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동 뉴욕 특파원
동상은 소저너 트루스, 수전 앤서니, 엘리자베스 스탠턴 등 3명의 ‘개척자’가 탁자에 모여 대화하는 모습을 묘사했다. 모두 19세기 동시대를 살며 여성 참정권 및 인종차별 철폐에 평생을 헌신한 여성들이다. 앤서니는 여성에게 투표권이 없던 1872년 투표를 감행한 죄로 100달러의 벌금형을 받았지만 평생 벌금 납부를 거부한 일로 유명하다. 스탠턴은 1866년 여성 최초로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해 남성 유권자 1만2000명에게서 고작 24표를 받았다. 노예로 태어나 훗날 자유를 찾은 트루스는 자기 아들을 노예로 사간 백인을 상대로 소송을 걸어 승리한 흑인 인권 운동가다.
공원을 찾은 그날은 평소보다 훨씬 많은 뉴요커들이 동상 주변에 모여들어 기념촬영을 하고 있었다. 카멀라 해리스 상원의원이 첫 여성 부통령에 당선되면서 역사 공부의 장으로 더욱 주목을 받았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올해는 미국에서 여성 참정권 획득 100주년이 되는 해라서 의미가 더 컸다. 이곳에서 한동안 기념비를 구경하던 엘리라는 중년 여성은 기자에게 “이 세 분은 여성 부통령의 당선을 저세상에서 매우 자랑스러워할 것”이라며 “그들의 헌신이 오늘을 있게 했다”고 말했다. 세 사람은 모두 1920년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한 수정헌법 19조를 끝내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해리스 당선인은 얼마 전 승리 연설에서 “여성 참정권을 위해 싸웠던 100년 전 여성들을 생각한다. 나는 그들의 어깨 위에 서 있다”고 말했다. 불합리에 맞서 싸우던 개척자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해리스는 존재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인종 차별과 이념 갈등에 바람 잘 날 없는 미국이지만, 그래도 이 나라는 중요한 순간마다 선조들의 희생과 헌신을 발판 삼아 역사의 큰 걸음을 앞으로 내디디는 데 성공해 왔다. 바이든 못지않게 해리스의 백악관 입성에 시민들이 크게 환호하는 것은 미국이 그 큰 한 걸음에 다시 한번 성공했기 때문일 것이다.
유재동 뉴욕 특파원 jarret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