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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프랑스로 들끓는 중동… 이면엔 신흥 패권 경쟁도

입력 | 2020-11-12 03:00:00

[글로벌 현장을 가다]
참수 사건 이후 佛 강경대응 고수… 이슬람권 전역 반프랑스 정서 퍼져
“21세기 나폴레옹 新식민통치” 비판
선명성 부각하려는 이슬람 지도자들




1일 이집트 북부 엘사다트에 위치한 포쇼핑센터 1층 냉장 매대에 프랑스 유제품 브랜드 다논 요거트 제품이 있던 자리가 텅 비어 있다. 포쇼핑센터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최근 이슬람 선지자 무함마드를 비판한 만평을 ‘표현의 자유’ 이유로 옹호하고 이슬람에 대한 강경 정책을 펴자 이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프랑스산 제품을 판매하지 않고 있다. 카이로=임현석 특파원 lhs@donga.com

임현석 카이로 특파원

9일 이집트 카이로 모카탐 지역의 생활용품 판매점 소프라를 찾았다. ‘메이드인 프랑스(Made in France)’ 제품을 일절 찾아볼 수 없었다. 주인 카드리 압델 카델 씨는 한 선반을 가리키며 “원래 프랑스 가정용품 브랜드 ‘테팔’의 그릇과 프라이팬이 있던 자리다. 프랑스가 이슬람교 선지자 무함마드를 계속 모욕해서 항의 차원에서 2주 전 테팔 제품을 모두 반품했다”고 말했다.

앞서 1일 카이로 북쪽의 신도시 엘사다트의 포쇼핑센터를 찾았을 때도 비슷한 모습이었다. 냉장 매대를 꽉꽉 채웠던 프랑스 유제품 브랜드 ‘다논’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곳에서 만난 고객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노골적인 반무슬림 정책을 펴고 있다고 성토하며 “마크롱은 무슬림을 모독하는 21세기 제국주의자”라고 했다.

지난달 16일 이슬람교 창시자 무함마드를 풍자하는 만화를 수업 중 보여줬다는 이유로 프랑스 역사교사가 이슬람 극단주의자에게 참수됐다. 이후 마크롱 대통령이 이슬람 극단주의에 대한 강경 대처에 나서고, 무함마드 풍자를 ‘표현의 자유’라고 옹호하면서 프랑스와 이슬람권의 갈등이 갈수록 격화하고 있다. 겉으로는 극단주의 및 테러 방지를 앞세우지만 결국은 이슬람에 대한 비하와 차별이라는 게 이슬람권의 인식이다. 이에 중동 역시 프랑스 제품 불매 운동으로 맞서겠다는 기류가 뚜렷하다.




○ 프랑스-중동의 갈등 역사 반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017년 1월 취임 후 줄곧 무슬림 등 유색인종에 적대적인 정책을 폈다. 트럼프 대통령의 맏사위이자 유대계인 재러드 쿠슈너 백악관 선임보좌관 역시 트럼프 행정부의 ‘친(親)이스라엘, 반(反)팔레스타인’ 정책을 주도하며 이슬람권과 척을 졌다. 그런데도 이번처럼 북아프리카(이집트), 중동(이란 터키 사우디아라비아 요르단 아랍에미리트 쿠웨이트), 서남아시아(파키스탄), 동남아시아(인도네시아) 등 이슬람권 전역에서 미국산 제품 불매 운동, 각국 정상의 규탄, 시민들의 반미 시위가 일어난 적은 없었다.

전문가들은 이슬람권의 격한 반프랑스 정서의 이유로 제국주의로 인한 역사적 연원, 19세기 나폴레옹 황제를 연상시키는 마크롱 대통령의 행보 등을 꼽는다. 특히 1916년 영국과 프랑스가 각각 자국 외교관 마크 사이크스, 프랑수아 피코의 이름을 따서 맺은 ‘사이크스-피코 협정’이 오늘날 중동을 세계의 화약고로 만드는 씨앗이 됐다고 여긴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현재 이슬람권 영토 대부분을 지배했던 오스만튀르크 제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을 앞두자 오스만 영토를 비밀리에 나눠 먹기 위해 이 협정을 맺고 자신들의 땅으로 만들었다. 이슬람 종파, 부족, 언어 등이 달랐던 곳에 두 열강이 자의적으로 국경을 긋는 바람에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끝나고 열강이 물러난 후에도 중동 곳곳에서는 여러 세력이 각자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분쟁을 계속하고 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대립, 걸프전, 이라크전쟁, 시리아 내전 등 중동 현대사를 뒤흔든 주요 사건이 모두 사이크스-피코 협정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과관계를 맺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18세기 후반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이 서구 열강의 이집트 유물 약탈로 이어졌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프랑스 장교와 고고학자들이 이집트의 세계적 문화유산으로 여러 상형문자가 새겨진 로제타석을 발견했다. 프랑스군은 이를 본국으로 가져가려 했지만 나폴레옹이 실각하자 영국이 이집트에 고립된 프랑스군을 본국으로 무사히 귀환시켜 주는 조건으로 손에 넣어 현재 런던 대영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이집트인들이 “영국과 프랑스 유명 박물관에 있는 수많은 유물은 다 제국주의 열강이 이집트에서 불법 약탈한 것”이라고 분노하는 이유다.



○ “마크롱은 21세기 나폴레옹”
프랑스에는 ‘프랑스’와 ‘아프리카’를 프랑스어식으로 합친 ‘프랑사프리크(Francafrique)’란 단어가 있다. 실제 아프리카 전체에는 프랑스어가 가능한 인구가 1억 명에 달하고, 약 1만 명의 프랑스군이 주둔하고 있다. 제국주의는 사라졌지만 열강의 영향력은 여전하다는 평가가 나올 법하다.

특히 마크롱 대통령은 2017년 5월 집권 후 중동의 레바논, 알제리 모로코 튀니지 등 북아프리카, 니제르 말리 모리타니 등 서아프리카 등 과거 프랑스가 점령했던 이슬람권 각국 정세에 전임자보다 훨씬 적극 개입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올해 8월 4일 프랑스가 1920∼1946년 지배한 레바논에서 약 200명이 숨진 폭발 참사가 발생하자 바로 레바논을 직접 찾아가 주민들을 위로하고 피해 상황을 점검했다. 폭발 원인이 당국의 위험물질 방치 등 사실상 인재(人災)였고, 고질적인 부정부패와 경제난 등에 지칠 대로 지친 레바논 국민들은 일각의 신(新)식민주의 논란에도 마크롱을 격렬히 환영했다. 하지만 내정간섭 논란 역시 피할 수는 없었다. AP통신은 “이슬람권 소셜미디어에서는 마크롱 대통령을 ‘21세기 나폴레옹’으로 부른다”고 전했다.

프랑스는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남쪽 사헬 지방에서 창궐하고 있는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를 격퇴한다는 명분으로 이곳에서도 개입주의 기조를 고수하고 있다. 마크롱 집권 전인 2013년 4000여 명의 병력을 파견했고 2016년 부르키나파소, 차드, 말리, 모리타니, 니제르 등 서아프리카 5개국이 참여한 아프리카 연합군 구성 역시 프랑스의 후원 아래 이뤄졌다.

프랑스가 무슬림을 대하는 태도가 자국 경제 상황에 따라 표리부동하게 바뀐 점도 이슬람권의 반발을 사고 있다.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원(CNRS) 소속 사회학자 히샴 바네사 연구원은 동아일보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1970년대 프랑스 제조업 경기가 호황이어서 무슬림 노동력이 많이 필요할 때 대형 자동차업체 르노는 자발적으로 무슬림을 위한 ‘기도실’을 만들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프랑스 제조업 쇠퇴와 맞물려 무슬림 인력에 대한 차별이 가속화했다”고 지적했다.

즉, 값싼 노동력이 필요할 때는 무슬림 관용 정책을 펴다 자국 경기가 안 좋아지고 반이민 정서가 높아지자 정교분리와 세속주의라는 명분을 내세워 무슬림을 탄압하고 있다는 의미다.




○ 중동 내 패권 경쟁과 맞물려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 등 이슬람권 주요 지도자가 잇따라 마크롱 대통령을 거칠게 비판하는 것은 중동 맹주가 되겠다는 이들 지도자의 개인적 야심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서구 대표 국가인 프랑스에 맞서는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부각하기 위해 더 자극적이고 거친 언사로 마크롱과 프랑스를 공격한다는 의미다.

특히 이란, 터키 등은 모두 현 지도자가 장기 집권하고 있는 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와 경제난 등으로 국민들의 불만이 상당해 자국 내 반대파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는 효과 또한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터키는 최근 1년 반 동안 1340억 달러(약 150조 원)를 들여 자국 화폐 리라화 가치 하락을 막으려 했지만 최근 2년간 리라화 가치는 미 달러화 대비 약 45% 하락했다.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요르단 등 수니파 왕정 아랍국은 내심 ‘프랑스도 싫지만 터키와 이란이 중동 맹주로 부상하는 것 또한 싫다’는 자세다. 이란은 시아파 종주국이며 터키는 아랍과 민족, 언어가 다 다르다. 이들은 특히 터키가 이슬람 원리주의 및 정교일치를 주장하는 ‘무슬림형제단’을 적극 지원하는 것을 매우 껄끄러워한다. 자국 내 왕정 유지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수니파 아랍국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대선 승리에 내심 반색하는 분위기다. 트럼프 행정부의 고립주의, 친이스라엘 기조로 중동의 혼란이 더 증폭된 만큼 다자주의를 내세운 바이든 행정부가 출범하면 중동의 혼란 상황이 지금보다 나아지지 않겠냐는 분위기가 강하다. 하지만 바가트 코라니 이집트 아메리칸카이로대(AUC) 정치학과 교수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바이든 행정부가 트럼프 행정부보다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룰 수는 있겠지만 중동보다 아시아를 우선시하는 미 외교 기조 자체는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라며 “미국의 역할이 예전 같지 않은 중동에서 주요국의 패권 다툼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임현석 카이로 특파원 lh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