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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언어가 된 K팝… 각국 정치 이슈에 휘말릴 리스크도 커져[인사이드&인사이트]

입력 | 2020-11-13 03:00:00

해외 팬들 요구 많아진 K팝




임희윤 문화부 기자

‘이건 답이 없는 Test 매번 속더라도 Yes/딱한 감정의 노예/얼어 죽을 사랑해/LET’S KILL THIS LOVE!’

며칠 전 태국 방콕 시내의 민주화 시위대 물결 사이로 한국 그룹 블랙핑크의 노래 ‘KILL THIS LOVE’가 울려 퍼졌다. 가사를 따라 부르고 안무를 맞춰 추며 시위 현장을 흥겹지만 치열한 무대로 만들었다. 9일 로이터통신은 ‘태국 젊은이들, 정부에 맞서는 수단으로 케이팝을 들이다’라는 기사를 통해 이를 조명했다. 학생운동가 나차폴 찰로이클 씨는 “케이팝은 태국의 현재 상황에 대해 잘 모르는 세계의 젊은이들에게 인식을 고취할 수 있는 통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아르차흐를 인정해라!’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

지난달 아르메니아 소녀들은 카메라 앞에서 삐뚤빼뚤 한글로 직접 적은 팻말을 들어 올렸다. 아제르바이잔과의 전쟁을 멈춰 달라는 메시지를 아르메니아어도, 아제르바이잔어도, 러시아어도, 영어도 아닌 한국어로 호소하는 이유는 뭘까.

아시아가 들끓고 있다. 세계가 케이팝 콘텐츠를, 아이돌 멤버들의 입을 바라보고 있다. 케이팝 콘텐츠를 둘러싼 문화 전유(문화 도용)에 대한 문제 제기도 이제 6대주에서 쏟아진다. 더 이상 한국만의 음악이 아닌 케이팝이 출렁인다.

○ 이미지에서 오피니언으로…

최근 불과 보름 사이 양대 케이팝 그룹인 방탄소년단과 블랙핑크가 모두 중국 누리꾼의 집중 포화를 받았다. 방탄소년단은 리더 RM이 “양국이 함께 겪었던 고난의 역사와 많은 남성 및 여성의 희생을 영원히 기억해야 한다”고 한 것을 트집 잡았다. 한미 우호 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밴플리트상을 받으며 한 일반적인 소감을 두고 ‘항미원조’에 나섰던 중국을 무시한 처사라는 반응을 보인 것이다.

블랙핑크의 제니는 국내 동물원에 가서 판다와 놀아주는 영상을 공개했다가 ‘중국의 국보인 판다를 화장을 하고 마스크하지 않은 얼굴, 맨손으로 대했다’며 발끈한 누리꾼들의 손가락질에 직면했다.

‘항미원조’와 중화사상을 내세운 중국인들의 무리한 지적에 케이팝 팬들이 반발하자 미국의 워싱턴포스트까지 나서 ‘중국, 케이팝 거인 BTS에 패배했다’는 칼럼을 썼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지난달 23일 인스타그램 등 각종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케이팝 스타 계정 다수에는 오성홍기 사진과 함께 “오성홍기 수호자는 14억 명이 있다. 나는 국기 수호자다”라는 취지의 게시글이 올라왔다. 작성자는 레이(엑소), 빅토리아(전 f(x)), 주결경(전 프리스틴), 성소 미기 선의(우주소녀) 등 중국계 아이돌 멤버들. 국내 누리꾼들은 질타했지만 케이팝 팬덤 일각에서는 “중국 활동을 염두에 두면 어쩔 수 없다”는 동정론도 일었다.

일부 중국계 케이팝 멤버들은 홍콩 민주화 시위 때도 곤란을 겪었다. 시위에 대한 입장을 SNS에 공표하라는 중국과 홍콩의 팬들 등쌀에 차라리 침묵하거나 홍콩 경찰을 옹호하는 의견을 낸 것.

최근 태국 시위까지 장기화하면서 케이팝 아이돌들에게 SNS DM(다이렉트 메시지)과 댓글이 아시아 각국의 언어로 쏟아지고 있다. 지난달 2PM의 닉쿤과 갓세븐의 뱀뱀 등 일부 태국 출신 아이돌은 “폭력으로는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는 글을 자신의 계정에 올렸다.

태국 출신 멤버가 있는 아이돌 그룹의 소속사인 A사 관계자는 “닉쿤, 뱀뱀처럼 무게감이 있는 아이돌의 경우 최대한 순화한 모호한 메시지라도 남겨야 하는 상황이지만, 누리꾼의 추궁이 덜한 덜 유명한 외국계 아이돌은 이런 민감한 이슈가 있을 때 최대한 침묵을 지키는 게 상책”이라고 말했다.

○ 표백된 케이팝, 탈정치 깨고 오피니언을 원하다


케이팝은 미국 정치에도 소환됐다. 앞서 6월 방탄소년단의 팬들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대해 대선 유세장 ‘노쇼’ 운동을 벌였다. 트와이스의 ‘Feel Special’은 6일부터 미국의 누리꾼들 사이에서 조 바이든의 역전극을 축하하는 주제가 격으로 소비되고 있다.

케이팝에 정치적 입장을 요구하거나 자국의 사회적 이슈에 대한 입장 표명, 나아가 홍보를 요구하는 일은 갈수록 늘고 있다. 앞으로 더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글로벌화한 케이팝이 더 이상 한국인만의 음악이 아니라는 이유만 있는 게 아니다. 케이팝의 특수성이 이런 경향을 더 부추긴다는 의견도 있다. 웹진 ‘아이돌로지’의 미묘 편집장은 “국내에서는 보수적 정권, 검열 등 여러 영향으로 탈정치화, 표백된 모습으로 케이팝이 발생하고 장기간 발달했다”며 “그러나 해외에서 볼 때 케이팝은 대단히 정치적인 문화 콘텐츠다. 영미권의 주류 문화에 대항해 소수자들의 대안 문화로서 함께 성공하는 모습에 팬들이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해외 팬들의 경우, 되레 케이팝에 대한 정치적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미묘는 “케이팝을 지지하는 ‘나’의 행위가 이미 정치적인, 고도로 정치적인 입장을 지닌 팬들이 늘어나는데 이런 신(scene)에서 모호한 입장과 침묵만 지키는 아이돌은 이율배반적이라는 시선이 있다”고 설명했다. 개별 아티스트의 정치적 견해보다 기획사의 실리 판단이 의사결정에 더 크게 작용하는 케이팝 특유의 시스템이 해외 팬들에겐 아직 낯설다는 것.

그간 견지한 탈정치적 태도, 오피니언이 표백된 케이팝 특유의 콘텐츠가 정치적 상상력을 오히려 자극하는 경우도 있다. 어조는 강하지만 의견은 모호해서다. 케이팝의 폭발적이고 파격적인 음악이나 안무에 맞춘 선동적인 뮤직비디오들이 특히 그렇다. 자세한 맥락은 생략돼 있지만 도시에서 갑자기 조명탄이 날거나 도심이 불타오르는 연출들이 한국 뮤직비디오에 곧잘 등장한다. 젊은이들이 열광할 수 있는 저항이나 혁명의 인상은 풍기되 서사나 맥락은 거세한 형국이다.

○ 무슬림 인디언 아프리카계까지



케이팝의 세계화는 정치적 태도뿐 아니라 문화 전유에 대한 논란도 불붙인다. 걸그룹 ‘A’는 지난해 방송 무대에서 배경으로 잠시 모스크를 송출했다가 무슬림 팬들에게 뭇매를 맞았다. 또 다른 여성 그룹은 뮤직비디오의 배경에 인디언식 텐트인 ‘티피’를 배치했다가 미국 인디언계 팬들에게 보이콧 압력을 받았다. B그룹은 이마에 보석 장신구를 붙였다가 인도 팬들의 지적을 감수해야 했다. (여자)아이들 멤버들은 방송에서 편곡 방향을 논의하며 “아프리카 추장처럼 하고 아프리카 타악기처럼 소리를 만들자”고 했다가 아프리카를 비롯한 해외 팬들의 지적을 받기도 했다.

대형 가요기획사 C의 홍보팀장은 “타당한 지적도 있지만 익명성에 기댄 과도한 트집도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서 “그렇다 해도 하나의 게시물이 얼마만큼 바이럴 폭발력을 가질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철저한 검수 과정을 거치고 있다”고 귀띔했다. C사의 경우, 모든 콘텐츠에 대해 (뮤직비디오 등을 만든) 생산 당사자의 1차 검수, 의상 안무 미술 등 사내 전문 인력의 2차 검수, 언론사의 팩트체크팀을 연상시키는 모니터팀이나 리스크 관리실의 3차 검수를 거치고 있다.

영국 런던에서 케이팝 사업을 하는 이혜림(모니카 리) 프런트로(FrontRow) 레코드 대표는 “여러 문화가 섞인 유럽권에서는 문화 전유 논란에 상대적으로 관대한 경향이 있다. 다만 종교적인 언급만은 피하고 있다”면서 “케이팝이 특정 문화권의 상징물을 배경으로 춤을 추는 콘텐츠가 조롱처럼 느껴질 소지가 있다. 조심해야겠지만 케이팝의 미장센, 소품, 스토리가 예술적 영역에서 인정받는 분위기도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아이돌 소속사의 한 관계자는 “최근 한복 의상이나 한옥 배경을 활용한 아이돌 콘텐츠가 늘어나는 것도 이국적인 인상을 주면서 타 문화 전유의 논란 여지는 없앤 묘책인 셈”이라고 말했다.

국내 문화 콘텐츠에 대한 논란의 역사를 돌아봐도 2020년의 상황은 상전벽해이자 새로운 양상이다. 국내 대중문화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시대에 따라 그 발화자와 태도가 바뀌어 왔다. 군사독재 시절이던 1960, 70년대에는 권력형 검열이 주체였다. 휘어진 칼 노릇을 한 이른바 퇴폐·저속 문화 논란이 있었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이전이던 1980, 90년대에는 애국주의가 득세하기도 했다. 이와 비교하면 전 세계인이 케이팝 콘텐츠의 서사와 디테일에 의견을 제시할 수 있고 그것이 활발해진 2020년대는 새로운 시대가 될 가능성이 높다.

김헌식 문화평론가(동아방송대 교수)는 “케이팝은 표상과 기호만 취하면서 그 맥락에는 민감하지 못한 측면이 있었다”면서 “세계 젊은이들이 공통적으로 열광할 콘텐츠로 케이팝이 급부상하면서 새로운 과제가 앞에 놓였다”고 말했다.

바이든 취임 이후에도 미중 간 긴장이 첨예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중화권 팬과 미국 팬의 세계관이 충돌하는 이슈가 발생할 경우를 전문가들은 최악의 상황으로 본다. 김 평론가는 “창작 방식 개선, 본질에 충실한 세계 문화 학습, 검수가 있어야겠다. 또 논란이 있을 때 기획사가 전면에 나서기보다 팬들에게 충분한 토론의 장을 마련해주는 것도 방법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임희윤 문화부 기자 i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