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벽의 문명사/데이비드 프라이 지음·김지혜 옮김/408쪽·2만 원·민음사

만리장성은 명대에 와서 벽돌로 쌓은 오늘날의 모습을 갖췄다. 그 이전에는 수없이 무너져 내려 끊임없이 보수가 필요한 흙벽이었다. 문인들은 ‘흙과 사람 뼈로 지은 벽’이라고 탄식했다. 픽사베이

문명 이래 장벽의 대명사인 중국의 만리장성에서도, 아테네의 성벽이나 로마인들의 장벽에서도 이를 건설한 민족은 생산력이 높은 지역의 ‘문명인’이었다. 중국인들은 북쪽의 삭막한 지역을 정복하려 하지 않았고 로마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장벽 바깥 ‘삭막한’ 땅 부족들은 공포스러운 전사로 자라났다.
일단 만들어진 장벽의 존재는 그 안팎 민족의 성향을 좌우했다. 아테네는 5세기 중반에 건설한 성벽으로 절정을 이뤘고 외부 공격을 받을 때도 연극 상연을 그치지 않았다. 스파르타는 미케네인의 ‘유약한’ 방벽을 비웃고 벽 쌓기를 거부했으며 그 결과 한층 호전적인 성향을 갖게 됐었다.
진(秦)나라 이후 만리장성을 방어선으로 삼았던 중국은 가장 적나라한 ‘벽의 영향’을 보여준다. 몽골족의 침입으로 인구 절반을 잃는 참화를 겪은 뒤 원나라를 몰아내고 중국인 왕조를 복원한 명 태조 주원장은 이후 황제들에게 ‘정복하지 마라, 강력한 수비를 유지하라’고 훈계했다. 하지만 1449년 명 정통제가 친정에 나섰다가 몽골군에 사로잡힌 ‘토목의 변’이 발생했고, 중국은 한층 더 수비적으로 변했다. 대항해 시대에 중국에 온 서양 상인들은 유별나게 방어적인 중국의 국가 정책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저자는 인도-파키스탄 사이에 놓인 장벽, 그리스-터키 사이의 장벽, 4년 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과 함께 세계인의 관심을 받은 미국-멕시코 간 장벽도 언급하지만 역사 속의 장벽과 뚜렷한 연계점을 시사하는 데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하다. 그래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문명인이라고 자부하는 집단은 ‘장벽 안’의 세계에서 안전하다고 생각하며 우월감을 확보해 왔다. 그러면서 내심 ‘벽 밖’ 집단의 원시성에도 호기심과 찬미를 그치지 않았다. 원제 ‘Walls: A History of Civilization in Blood and Brick(장벽들: 피와 벽돌의 문명사·2018년)’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