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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포커스]트럼프, 백인 지지세 안 꺾여… 끝나지 않은 ‘美우선주의’

입력 | 2020-11-14 03:00:00

美대선 표심으로 본 ‘트럼프 4년의 여파’




7일(현지 시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대선 승리가 확정되자 수도 워싱턴의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BLM)’ 광장에 바이든 지지자들이 몰려나와 기뻐하고 있다. 워싱턴=AP 뉴시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졌다. 하지만 트럼프 지지 현상, 즉 트럼피즘이 끝난 것은 아니다.’

트럼프 대통령을 중심으로 이번 미 대선 결과를 해석하면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 우선주의와 백인 우월주의 등을 앞세워 백악관에 입성했던 트럼프 대통령은 4년 동안 각종 기행과 막말, ‘편 가르기’ 등으로 숱한 비판을 받았다. 임기 내내 낮은 지지율을 보이다가 결국 재선에 실패했다.

하지만 그는 이번 대선에서 약 7200만 표를 얻었다. 이는 4년 전(6300만 표)보다 약 900만 표 많은 것이다. 조 바이든 당선인과의 전국 득표율 격차는 3.2%포인트로 대선 전 각종 여론조사에서 나타났던 차이보다 훨씬 적었다. 그만큼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지지는 만만치 않았고 4년간의 재임 동안 단단해졌다는 것이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그가 기존 정치인들과 달리 보통 사람의 언어로 이야기하고, 실행력이 높다는 점을 높게 평가했다. ‘한다면 한다’는 이미지가 강했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2024년 재출마설도 이처럼 지지 기반이 강력하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이야기다.


○ 백인·고졸·남부·고령층의 콘크리트 지지

출구조사 전문 여론조사업체 에디슨리서치가 대선 당일인 3일 미 전역의 유권자 약 2만5000명을 대상으로 시행한 조사를 보면 미국이 ‘친(親)트럼프’와 ‘반(反)트럼프’로 완전히 갈라졌음을 볼 수 있다. 나이, 인종, 성, 교육수준, 지역 등에 따라 트럼프 대통령과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을 지지한 사람들은 극명한 차이를 보였다. 백인, 고졸 이하 학력, 남부 및 중서부 시골 거주, 고령층 유권자들은 트럼프를 지지했고 비백인, 대졸 이상 학력, 동부·서부 및 대도시 거주, 20, 30대 젊은층이 바이든을 찍는 일종의 여촌야도(與村野都) 현상이 뚜렷했다.

하루 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자들은 대선의 핵심 경합주인 북부 미시간주 랜싱의 한 개표소 앞에서 ‘부정 선거’를 주장하며 항의 집회를 벌였다. 이 중 일부는 총을 들었다. 랜싱=AP 뉴시스

4년 전 트럼프 대통령의 대선 승리를 견인했던 ‘고졸 이하 백인’은 올해 선거에서도 트럼프 대통령의 핵심 지지 기반으로 꼽힌다. 에디슨리서치는 올해 이들의 67%가 트럼프 대통령을 찍은 것으로 분석했다. 2016년 대선에서 그는 고졸 이하 백인 유권자로부터 66%의 지지를 얻었다. 백인 저학력자의 굳건한 지지가 그대로 이어졌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들은 반낙태, 감세, 총기규제 반대 등 트럼프 대통령의 대표 정책을 지지한다. ‘우편투표 부정’ ‘바이든은 극좌파의 꼭두각시’ 등 근거 없는 대통령의 발언에도 높은 신뢰를 보였다. 특히 미국이 칭송하는 세계화와 정보기술(IT) 혁명의 과실이 고학력 엘리트에게만 돌아갔고 묵묵히 노동을 해온 자신들은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채 뒤처지고 있다고 분노한다.

저학력 백인의 콘크리트 지지는 트럼프 재선 캠프의 ‘집토끼 올인 전략’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즉, 트럼프 대통령은 핵심 지지층의 지지만으로도 집권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중도층 유권자를 적극적으로 포용하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극단적으로 말해 몇몇 경합주에 있는 백인 저학력층만 적극 공략해도 재선이 가능하다는 판단 아래 더 극단적이고 더 분열적인 정책을 구사하려 했을 것이라는 의미다.

실제 그는 이번 대선에서 여론조사 열세를 딛고 핵심 경합주인 오하이오에서 넉넉한 표 차로 승리했다. 신시내티와 클리블랜드라는 주내 양대 대도시에서는 바이든 지지자가 적지 않았지만 농촌이 대부분인 나머지 지역에서는 트럼프에게 몰표가 쏟아졌다. 미시간, 위스콘신 등에서도 현장투표에서 앞서다 민주당 성향이 강한 지역의 사전투표 결과가 반영되자 역전을 허용했다. 트럼프 시대는 끝나도 외연을 넓히기보다는 ‘우리 편’에게만 먹힐 수 있는 내용을 극단적으로 호소하는 제2, 제3의 트럼프가 언제든 출현할 가능성이 열려 있는 셈이다.


○ 히스패닉과 흑인은 ‘경제’로 공략

툭하면 인종차별적 발언을 일삼은 트럼프 대통령이 비백인 유권자의 지지를 얻지 못할 것이란 예상도 빗나갔다. 에디슨리서치는 이번 선거에서 히스패닉 유권자의 32%가 트럼프를 지지했다고 예측했다. 4년 전 대선의 실제 지지율(28%)보다 올랐다.

트럼프 대통령이 여론조사에서 다소 열세였지만 대선에서는 승리했던 핵심 경합주 플로리다에서도 이 현상을 관측할 수 있다. 개표 결과, 트럼프 대통령은 전체 인구 86만 명 중 약 90%가 히스패닉인 히댈고 카운티에서 41%의 지지를 얻었다. 4년 전(28%)보다 13%포인트 높다.

세계적인 거부이자 올해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도 출마했던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은 사재를 털어 플로리다에서 바이든 홍보에 나섰다. 하지만 라틴계가 많은 플로리다 유권자들은 트럼프를 선호했다. ‘바이든을 찍으면 미국이 베네수엘라나 쿠바처럼 된다’는 트럼프 측 주장이 사실 여부를 떠나 히스패닉 유권자에게 통한다는 점을 보여줬다.

올해 5월 백인 경관의 목 조르기로 숨진 비무장 흑인 조지 플로이드 사태로 미 전역에서 인종차별 반대 시위가 거셌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흑인 유권자로부터 얻은 표 또한 4년 전보다 늘었을 가능성이 높다. 에디슨리서치는 올해 대선에서 그가 흑인 유권자로부터 12%의 지지를 얻었을 것으로 추산했다. 2016년 대선(8%)보다 4%포인트 높다.

그 이유로 경제가 꼽힌다. 트럼프 대통령은 유세 중 “재선에 성공하면 ‘흑인을 위한 플래티넘 플랜’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미 흑인 공동체에 5000억 달러를 투자해 일자리 300만 개를 만들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뉴욕타임스(NYT)는 최초의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8년 집권했지만 삶의 실질적 개선을 느끼지 못한 흑인 유권자들의 실망감이 트럼프 지지로 이어졌다고 진단했다.


○ 고학력자, 여성, 젊은층 외면

트럼프 지지층이 늘어난 만큼 그를 싫어하는 사람 또한 증가했다. 이번 대선에서 조 바이든 당선인이 얻은 표는 약 7700만 표. 4년 전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대선후보가 얻은 6600만 표보다 약 1100만 표가 많다. 특히 고학력자, 여성 유권자 등이 트럼프 재집권을 막으려고 바이든에게 몰표를 던졌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클린턴 후보는 4년 전 대선에서 대졸 이상 백인으로부터 45%의 지지를 얻었다. 트럼프 대통령(48%)보다 낮았다. 반면 에디슨리서치에 따르면 바이든 당선인은 이들 유권자로부터 51%의 지지를 얻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학력 백인의 지지율이 6%포인트 올라간 셈이다.

미 인구 변화도 트럼프 대통령에게 불리한 쪽으로 바뀌고 있다. 시민단체 미국진보센터(CAP)에 따르면 2020년 미 전체 유권자 중 고졸 이하 백인의 비율은 2016년(44%)보다 2.3%포인트 감소한 41.7%다. 선거전문매체 쿡리포트는 “투표 가능 인구 중 트럼프 대통령의 확실한 지지 기반인 고졸 이하 백인 인구 비율은 계속 줄어드는 반면 대졸 이상 인구는 증가하는 추세”라고 진단했다.

여성 유권자와 젊은층도 트럼프 대통령을 외면했다. 에디슨리서치는 그가 올해 여성 유권자로부터 바이든보다 15%포인트 낮은 42%의 지지를 얻었을 것으로 분석했다. 18∼29세 유권자에서는 바이든의 지지율 예측치가 60%에 달해 트럼프 대통령(36%)을 크게 웃돌았다.

즉, 아직은 베이비부머 세대, X세대 등에 비해 미 전체 유권자 내 비중이 높지 않지만 향후 늘어날 수밖에 없는 밀레니얼 세대(1981∼1996년 출생자), Z세대(1997년 이후 출생자)를 사로잡을 의제가 없다면 공화당이 향후 대선에서도 불리할 수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정치매체 폴리티코는 “공화당이 2016년 트럼프 당선 이후 백인 유권자의 불만 해소에 중점을 뒀지만 젊은층이 중시하는 기후변화, 인종차별 등에 대한 관점을 수정하지 않으면 향후 선거에서 승리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 바이든 리퍼블리컨의 등장

단순 수치로 환산할 수 없는 반트럼프 성향의 공화당 지지자, 즉 ‘바이든 리퍼블리컨’의 등장 역시 트럼프 대통령의 패배에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당적을 바꿀 수는 없지만 미국의 위상과 영향력 실추를 막기 위해서라도 트럼프가 아닌 바이든을 찍겠다며 바이든 지지를 공개 선언한 공화당의 전·현직 고위 인사만 약 600명에 달했다. 이들의 행보가 주류 공화당원과 보수 유권자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가 나온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콜린 파월 전 국무장관, 2012년 공화당 대선후보 밋 롬니 상원의원(유타) 등 당내 거물, 트럼프 행정부의 첫 국방장관인 제임스 매티스 등은 대선을 앞두고 잇달아 바이든 지지를 선언했다. 공화당 소속 필 스콧 버몬트 주지사 역시 대선 당일 “평생 민주당 대선후보를 지지한 적이 없지만 나라를 위해 바이든을 찍었다”고 밝혔다.

특히 올해 8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바이든 지지를 일찌감치 선언한 고 존 매케인 전 상원의원의 부인 신디 여사(66)는 공화당 텃밭인 서부 애리조나에서 바이든 당선인이 선전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애리조나에서 개표가 진행 중이지만 AP통신 등은 바이든 후보가 승리한 것으로 분류하고 있고, 민주당 대선후보가 애리조나에서 승리한 것은 1996년 빌 클린턴 전 대통령 이후 24년 만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최측근 캘리앤 콘웨이 전 백악관 선임고문의 남편 조지 콘웨이 변호사 역시 공화당 인사들을 중심으로 한 트럼프 낙선운동 ‘링컨프로젝트’를 주도했다.


○ 2024년 대선 출마설로 벌써 시끌

두 번의 대선에서 약 1억3500만 표를 얻은 트럼프 대통령이 2024년 대선에 다시 도전할 가능성이 거론된다. 현실적으로 대선 결과를 뒤집기 어려운데도 그가 계속 선거 불복 의사를 표명하는 것 또한 재출마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지지층을 미리 결집시키려는 행보라는 의미다. ‘트럼프 호위무사’로 불리는 린지 그레이엄 공화당 상원의원은 9일 “대통령이 이번 선거에 대한 법적 다툼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2024년 대선에 재출마해야 한다. 재출마를 독려할 것”이라고 밝혔다.

미 대통령 임기는 두 번으로 제한돼 있지만 꼭 연임일 필요는 없어 그의 재출마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19세기 민주당 출신의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1885∼1889년, 1893∼1897년 두 차례 대통령을 역임했다. 1888년 대선에서 패하자 4년 후 다시 도전해 당선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4년 후 재출마를 택한다면 굳이 공화당 경선에 목매지 않을 것이란 분석까지 나온다. 그는 2016년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에도 ‘아웃사이더’인 자신을 배척하는 공화당 주류를 비난하며 무소속 출마를 언급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건재한 정치적 영향력은 바이든 행정부에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윌리엄 갤스턴 브루킹스 거버넌스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접전 끝에 선출된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라고 지적했다. 이번 대선으로 미국의 분열이 생각보다 훨씬 심하다는 것이 드러난 만큼 사실상 국민 절반의 반대를 등에 업고 출범할 새 행정부의 앞날에 상당한 먹구름이 드리우고 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임보미 기자 bo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