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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플래시100]‘그냥 쓰자’ ‘고쳐 쓰자’ ‘새로 짓자’…임시정부 어디로 가나?

입력 | 2020-11-17 11:40:00

1923년 6월 25일






플래시백
1923년 벽두부터 한반도 안팎에서 내로라하는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상하이로 모여 들었습니다.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죠. 1월 3일 시작한 국민대표회의는 자격심사부터 진행했습니다. 대표로 인정할지를 판가름하는 절차였죠. 임시정부 국무총리 대리를 지냈고 이 회의 임시의장으로 뽑혔던 안창호도 한때 사임할 만큼 까다로운 심사였습니다. 지역·단체대표 125명이 심사를 통과해 3월부터 독립운동사상 최대 규모 회의가 본격 개막했습니다.

국민대표회의는 제헌의회와 같았죠. 헌법을 제정하는 국회라는 말입니다. 잠깐, 국회인 임시의정원과 행정부인 임시정부가 멀쩡하게 있는데 무슨 소리냐고요? 맞습니다.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있는데도 코앞에서 이 회의가 열렸죠. 의회가 2개 존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비정상적이고 기형적인 상황은 임시정부의 분열과 무능이 불러왔죠. 거족적인 3·1운동 덕분에 탄생한 임시정부는 1920년 말에 이르자 한계에 맞닥뜨렸습니다.

기호파와 서북파가 으르렁거리고 임시대통령 이승만과 국무총리 이동휘가 사사건건 맞선 데다 보다 못한 소장파가 우리가 나서겠다고 들이받는 지경이었습니다. 이승만과 이동휘의 갈등 뒤에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념 다툼 그리고 외교독립론과 무장투쟁론의 노선 대립이 깔려 있었죠. 그나마 독립운동을 잘 이끌었으면 넘어갔겠지만 그토록 기대를 걸었던 외교독립론은 워싱턴군축회의에서 무참한 실패를 맛봤죠. 임시정부가 설치한 교통국과 연통제는 이맘때 일제의 탄압으로 무너져 재정지원도 끊겼습니다.


박은식 등 14명은 일찌감치 ‘아(我) 동포에게 고함’을 발표해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요구했습니다. 1921년 2월이었죠. 하지만 당장은 워싱턴군축회의에 집중할 때라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큰 회의를 치를만한 돈도 없어서 시간만 차일피일 흘렀죠. 미국으로 떠난 이승만을 대리한 신규식 내각이 무너져 임시정부는 간판만 내건 상태였습니다. 마침 ‘레닌자금’이 도착해 가까스로 회의를 열 수 있었죠.

국민대표회의를 놓고 3개 진영이 형성됐습니다. 임시정부를 그대로 두자는 ‘고수파’와 이대로는 안 되니 고쳐서 쓰자는 ‘개조파’, 헐고 완전히 새로 짓자는 ‘창조파’였죠. 고수파는 하와이의 이승만으로부터 원격 지휘를 받는 기호세력 위주였고 개조파는 안창호 김동삼 여운형 윤자영 김철수 등이 중심이었습니다. 민족주의자와 일부 사회주의자들이었죠. 창조파는 박용만 신채호 김만겸 문창범 등 사회주의자와 일부 민족주의자들이 주축이었습니다.


6개 분과위원회를 두고 독립운동의 방향과 정책을 논의할 때까지는 그래도 순조로웠죠. 하지만 ‘시국문제’인 임시정부를 놓고는 ‘고쳐 쓰자’와 ‘새로 짓자’의 거리가 줄지 않았습니다. 개조파는 이승만을 탄핵하고 헌법개정, 정부조직 변경 등 권한을 국민대표회의에 주자며 고수파를 설득했으나 벽을 넘진 못했고 창조파도 주장을 굽히지 않았죠. 급기야 5월이 되자 의장 김동삼 일행이 통일은 틀렸다며 돌아갔고 곧이어 개조파 57명도 집단 탈퇴했습니다.

그러나 창조파는 6월 7일 자기들끼리 헌법을 제정하고 국무위원을 뽑았습니다. 국호도 정했고요. 동아일보 6월 25일자 3면은 이 소식을 전했죠. 기사 뒤에는 창조파의 독단을 성토하는 개조파 인사들의 이름이 길게 붙어 있습니다. 5개월이나 회의를 거듭했으나 난맥상만 드러낸 꼴이었죠. 이후 창조파는 새 정부를 세운다며 블라디보스토크로 갔지만 믿었던 소련이 일본을 의식해 지원을 거부하자 모두 물거품이 됐죠. 동아일보는 취재가 힘들어 며칠씩 늦게 기사를 실었습니다. 3월 17일자는 2월 14, 15, 20, 21, 22일 5일치 소식을 한꺼번에 싣기도 했죠. 이런 기사로나마 기대를 안고 지켜보던 독자들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이진 기자 leej@donga.com


원문

創造派(창조파)의 會議(회의) 終了(종료)
국무위원과 집행위원을 선뎡

국민대표회의는 개조파(改造派) 대표 오십여 인은 불참한대로 창조파 대표 사십여 인만 법조계 모처에서 칠일 오후 한시에 계속 개회하야 국무위원으로 윤해(尹海) 씨 등 삼십삼 인을 선덩하고 고문(顧問)으로 박은식(朴殷植) 씨 외 삼십일 인을 추천하엿스며 집행위원은 內務委員(내무위원) 申肅(신숙) 外交委員(외무위원) 金奎植(김규식) 財務委員(재무위원) 尹德甫(윤덕보) 經濟委員(경제위원) 金應爕(김응섭)으로 추천하엿는대 혁명운동에는 군사(軍事)가 뎨일 중대한 임무이라 하야 군무위원은 아즉도 전형 중이며 오후 세시에 태극긔에 경례를 하고 한국독립만세를 부른 후 오래동안 끌든 국민대표회의가 창조파만은 아조 폐회하게 되엿다더라.(상해)

委員(위원) 活動計畫(활동계획)
각처에 헤여저서

국민대표 창조파가 조직한 국무위원은 한 곳에 모혀 잇지 아니하고 각처로 허여저서 자긔네의 마튼 바 활동을 하리라더라.(상해)

改造派(개조파) 聲明書(성명서)
오십칠 인 련서

창조파의 국무위원이란 새 긔과 조직에 대하야 개조파 오십칠인은 반대를 표명하고 댱문의 성명서를 륙월 삼일날 자로 발표하얏는대』 그 대의는 림시정부는 삼일운동의 결뎡인대 출석원의 삼분지 이□나 되는 개조안을 무시하고 사십오 인이 퇴석 통고를 하고 불착한대로 국호를 따로 뎡하야 새 국가를 만든 것을 성토한다』 하엿고 서명한 단톄와 씨명은 아래와 갓더라.

▲全羅道(전라도) 代表(대표) 金澈(김철)、鄭光好(정광호)、金元白(김원백) ▲慶尙道(경상도) 金常漢(김상한)、金尙德(김상덕)、申二鎭(신이진) ▲忠淸道(충청도) 尹敬一(윤경일) ▲京畿道(경기도) 吳永善(오영선) ▲平安道(평안도) 趙尙爕(조상섭)、李裕弼(이유필)、孫貞道(손정도)、李鐸(이탁) ▲新開嶺南(신개영남) 白南俊(백남준) ▲新開嶺北(신개영북) 金濬(김준) ▲哈巴嶺西(합파영서) 李重浩(이중호) ▲南滿鐵道線邊(남만철도선변) 柳振昊(유진호) ▲上海南京(상해남경) 鮮于爀(선우혁) ▲十三道總幹部(13도총간부) 金甲(김갑) ▲靑年會聯合(청년회연합) 徐保羅(서보라) ▲○○○○○○ 張洪吉(장홍길)、金重吉(김중길) ▲○○○靑年會(청년회) 姜逸(강일) ▲○○靑年獨立團(청년독립단) 鄭仁濟(정인제) ▲黃海道(황해도)○○○○團(단) 金鉉九(김현구) ▲○○○○靑年冒險團(청년모험단) 朴用芸(박용운) ▲共成團(공성단) 全弘敍(전홍서) ▲碧潼大韓靑年團(벽동대한청년단) 金○山(김○산) ▲天摩隊(천마대) 沈龍俊(심용준)、蔡君仙(채군선) ▲大韓愛國婦人會(대한애국부인회) 金瑪利亞(김마리아) ▲太極團(태극단) 康景善(강경선) ▲碧昌義勇團(벽창의용단) 楊承雨(양승우) ▲赤色勞働組合(적색노동종합) 張志□(장지□) ▲軍政署(군정서) 金東三(김동삼) 裴天澤(배천택) ▲統義府(통의부) 金昌煥(김창환)、金履大(김이대) ▲大韓獨立軍(대한독립군) 鄭信(정신)、尹珽鉉(윤정현) ▲大韓獨立軍團(대한독립군단) 李曉山(이효산)、趙相璧(조상벽) ▲韓族會(한족회) 金衡植(김형식)、李震山(이진산) ▲大韓赤十字會(대한적십자회) 梁瀗(양헌) ▲上海大韓愛國婦人會(상해대한애국부인회) 吳義橓(오의순) ▲光復軍團(광복군단) 羅愚(나우) ▲留寧韓人學友會(유녕한인학우회) 呂運亨(여운형) ▲新韓靑年黨(신한청년단) 宋秉祚(송병조) ▲歸一黨(귀일당) 李鴻來(이홍래) ▲天主敎(천주교)○○○ 郭然盛(곽연성) ▲공산당 王三德(왕삼덕)、玄鼎健(현정건) ▲大韓義民會(대한의민회) 尹智淳(윤지순) ▲韓國獨立决死隊(한국독립결사대) 鮮于昶(선우창) ▲美洲國民會(미주국민회) 安昌浩(안창호) ▲江原道(강원도) 代表(대표) 李何蘇(이하소) ▲韓國義勇軍事會(한국의용군사회) 張基永(장기영)

『豫定(예정)대로 進行(진행)』
창조파의 태도

창조파에 대한 림시정부와 개조파의 성토문에 대하야 창조파 간부 모 씨는 말하기를 『장래에 저항하지 아니하고 예뎡대로 일만 하야 나가겟다』 하더라.(상해)

中立派(중립파)의 反對(반대)
일곱 사람이 퇴석

개조파와 챵조파 이외의 중립파로 그대로 회의에 계속 참석하든 박응칠 씨 등 칠 인도 창조파에 반대하고 퇴석한 후 성명서를 발표한다더라.(상해)

李靑天(이청천) 氏(씨) 退塲(퇴장)
국무위원에 반대

창조파에서 국무위원 선거할 때에 아령 일대에서 유력한 군인으로 지목되는 리청텬(李靑天) 씨는 불찬성의 뜻을 표시하고 퇴석하엿스며 그 외에도 여러 사람이 퇴석하얏는대 그중에는 황해도 대표 박응칠(朴應七) 씨도 잇다더라.(상해)

間島代表(간도대표) 召還(소환)
십여 인이 도라가

국민대표회의가 너무 오래 끌고 분규가 이러나는데 대하야 서북간도에 잇는 단톄 대표 중 소환되여 회의 중에 도라간 대표가 십여 인이라더라.(상해)

현대문


창조파의 회의 종료
국무위원과 집행위원을 선정

국민대표회의는 개조파 대표 50여 명은 불참한 채로 창조파 대표 40여 명만 프랑스조계 모처에서 7일 오후 1시에 계속 회의를 열어 국무위원으로 윤해 씨 등 33명을 선출하고 고문으로 박은식 씨외 31명을 추천하였으며 집행위원은 내무위원 신숙, 외무위원 김규식, 재무위원 윤덕보, 경제위원 김응섭으로 추천하였다. 혁명운동에는 군사가 제일 중대한 임무라고 하여 군무위원은 아직도 뽑는 중이라고 하며 오후 3시에 태극기에 경례를 하고 한국독립만세를 부른 뒤 오랫동안 끌던 국민대표회의가 창조파만으로는 아주 폐회하게 되었다고 한다.(상하이)

위원 활동계획
각지에 흩어져서

국민대표 창조파가 조직한 국무위원은 한 곳에 모여 있지 않고 각지로 헤어져서 각자가 맡은 활동을 할 것이라고 한다.(상하이)

개조파 성명서
57명 연서


창조파의 국무위원이라는 새 기관 조직에 대하여 개조파 57명은 반대를 표명하고 장문의 성명서를 6월 3일자로 발표하였다. 성명서의 큰 뜻은 『임시정부는 3·1운동의 결정인데 출석원의 삼분의 이□나 되는 개조안을 무시하고 45명이 퇴석 통고를 하고 참석하지 않은 대로 국호를 따로 정하여 새국가를 만든 것을 성토한다』고 하였고 서명한 단체와 성명은 아래와 같다.

▲전라도대표 김철 정광호 김원백 ▲경상도 김상한 김상덕 신이진 ▲충청도 윤경일 ▲경기도 오영선 ▲평안도 조상섭 이유필 손정도 이탁 ▲신개영남 백남준 ▲신개영북 김준 ▲하바영서 이중호 ▲남만철도선변 유진호 ▲상하이·난징 선우혁 ▲13도총간부 김갑 ▲청년회연합 서보라 ▲○○○○○○ 장홍길 김중길 ▲○○○청년회 강일 ▲○○청년독립단 정인제 ▲황해도○○○○단 김현구 ▲○○○○청년모험단 박용운 ▲공성단 전홍서 ▲벽동대한청년단 김○산 ▲천마대 심용준 채군선 ▲대한애국부인회 김마리아 ▲태극단 강경선 ▲벽창의용단 양승우 ▲적색노동조합 장지□ ▲군정서 김동삼 배천택 ▲통의부 김창환 김이대 ▲대한독립군 정신 윤정현 ▲대한독립군단 이효산 조상벽 ▲한족회 김형식 이진산 ▲대한적십자회 양헌 ▲상하이대한애국부인회 오의순 ▲광복군단 나우 ▲유녕한인학우회 여운형 ▲신한청년단 송병조 ▲귀일당 이홍래 ▲천주교○○○ 곽연성 ▲공산당 왕삼덕 현정건 ▲대한의민회 윤지순 ▲한국독립결사대 선우창 ▲미주국민회 안창호 ▲강원도대표 이하소 ▲한국의용군사회 장기영

『예정대로 진행』
창조파의 태도

창조파에 대한 임시정부와 개조파의 성토문에 대하여 창조파 간부 모 씨는 『장래에 저항하지 않고 예정대로 일만 해 나가겠다』라고 말하였다.(상하이)

중립파의 반대
7명이 퇴석

개조파와 창조파 이외의 중립파로 그대로 회의에 계속 참석하던 박응칠 씨 등 7명도 창조파에 반대하고 퇴석한 뒤 성명서를 발표한다고 한다.(상하이)

이청천 씨 퇴장
국무위원에 반대

창조파에서 국무의원을 선거할 때 러시아령 일대에서 유력한 군인으로 지목되는 이청천 씨는 불찬성의 뜻을 표시하고 퇴석하였으며 그 외에도 여러 사람이 퇴석하였는데 그중에는 황해도 대표 박응칠 씨도 있다고 한다.(상하이)

간도대표 소환
10여 명이 돌아가

국민대표회의가 너무 오래 끌고 분규가 일어나는 것에 대하여 서북간도에 있는 단체 대표 중 소환되어 회의 도중에 돌아간 대표가 10여 명이라고 한다.(상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