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前 같은 역사 가진 한반도 남과 북으로 학계 나눠지며 역사 교과서 내용-형식 큰 차이
2015년 북한 개성에서 남한과 북한 역사학자 등이 광복 70주년을 기념해 고려 왕궁 터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만월대 발굴 현장을 둘러보는 모습. 분단 이후 남한과 북한의 역사 이론 및 교육은 크게 달라졌다. 동아일보DB
○일제의 식민사관
타율성론은 한반도의 역사가 외세의 간섭과 압력에 의해서만 변화했다는 논리입니다. 예를 들어 고대 시기 한반도의 남부는 일본이 세운 임나일본부, 북부는 중국이 고조선을 정복한 뒤 설치한 한사군의 영향력 아래에서 변화가 이루어졌다는 논리를 전개하였습니다. 외국 세력인 임나일본부와 한사군이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발전이 가능했다는 주장이지요.
정체성론은 한반도에서 왕조의 교체는 되풀이되었으나 사회경제적으로는 아무런 발전이 없었다는 논리입니다. 당시 유물사관의 논리에 따라 사회경제사를 연구하는 일본 학자들은 유럽과 일본의 역사가 고대 노예사회, 중세 봉건사회,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 발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고대 노예사회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으며, 유럽과 일본처럼 봉건사회로 발전하지 못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일제의 정체성론 비판한 백남운
정체성론을 주장한 일제 학자들은 한국사의 발전 단계에서 중세 봉건사회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한국사 봉건사회 결여론’을 주장했습니다. 당시 사회경제사학자들은 노예제 사회 이후 우리나라에서 발전한 중앙집권적 제도는 지방분권의 봉건제보다 열등한 제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유는 영지를 세습하는 봉건 영주는 지역 발전을 위해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농민을 보호하지만, 중앙집권적 국가의 지방 관료는 장기적인 계획 없이 농민 수탈에만 관심을 가져 지역이 점점 쇠퇴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중앙집권적 국가에서 지방사회를 통치하는 관료의 부정부패를 특히 강조했다고 할 수 있지요.
이런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봉건사회 결여론을 비판한 학자가 있었습니다. 한국사에서 봉건사회가 존재했다며 그 봉건사회의 존재 형태를 분석한 백남운(1894∼1979)입니다. 조선 말기 전북 고창에서 태어난 백남운은 수원고등농업학교를 마친 뒤 일본으로 유학해 도쿄상과대(현재의 히토쓰바시대)를 졸업했습니다. 그는 일본 유학 중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았고, 귀국 후에는 연희전문 경제학 교수(1925∼1938년)로 재직하면서 한국의 사회경제사 연구에 주력했습니다.
백남운은 1933년 ‘조선사회경제사’, 1937년 ‘조선봉건사회경제사’를 발간했습니다. ‘조선사회경제사’는 삼국시대를 노예제 사회로 규정하고, 그 구성과 특징 등을 서술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노예제 사회는 서양의 그리스·로마와 별 차이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조선봉건사회경제사’에서는 고려 시대를 아시아적(집권적) 봉건사회로 규정하고, 그 이유를 학문적으로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중고교에서 배우는 역사는 삼국시대부터 중앙집권적 사회가 형성되고 발전했다고 설명합니다. 또 삼국시대보다는 고려시대에, 고려시대보다는 조선시대에 중앙집권이 더 강화되었다고 서술합니다. 봉건사회는 지방분권을 가장 기본으로 하는데, 중앙집권적인 고려시대를 봉건사회로 설명하는 데는 문제가 많았습니다. 백남운 역시 이 문제를 학문적으로 설명해야 했습니다.
백남운은 봉건사회 앞에 집권적, 아시아적, 절대적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해 우리나라의 봉건제 사회를 설명했습니다. 그는 유럽의 장원제에서 나타난 영주와 농노의 예속 관계가 우리나라에도 존재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근거는 6세기 이후 지주전호제(지주소작제)의 발전으로 나타난 지주-전호(소작인)의 관계가 유럽의 영주-농노와 같다는 점이었습니다. 유럽의 농노와 우리나라의 전호는 사회경제적 지위와 역할이 거의 유사했다는 논리였습니다. 우리나라의 봉건제는 정치적으로는 중앙집권제, 경제적으로는 장원제를 특징으로 하며, 유럽 같은 전형적인 봉건제가 아니기 때문에 집권적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한국사의 발전 단계는 노예제 사회(삼국 정립기)-아시아적 봉건사회(신라 말부터 개항기)-외래 자본주의 사회(일제강점기)로 변화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광복 이후 역사학의 남북 분단
광복 이후 사회경제사학자들은 다시 연구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백남운은 신민당을 창당해 정치 활동을 했고 전석담, 박극채, 김한주 등은 조선과학자동맹이라는 학술단체를 만들고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상당수 사회경제사학자들이 1948년을 전후로 북한으로 넘어갔으며, 이후 김일성종합대학을 중심으로 연구 활동을 했습니다.
남한에서는 이병도를 중심으로 하는 실증주의 역사학자, 북한에서는 사회경제사학자들이 각각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국가체제에 맞는 역사학의 기초를 쌓기 위해 연구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오늘날 남한과 북한의 학생들이 배우는 역사 교과서는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도 아주 다릅니다. 1948년까지 같은 역사를 가진 하나의 민족이라는 사실이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남북 분단은 역사 연구와 교과서에까지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그 결과 우리 역사를 기억하고 인식하는 내용과 방법에 많은 차이를 가져왔습니다.
이환병 서울 용산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