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진’의 도루묵구이.
석창인 석치과 원장·일명 밥집헌터
도루묵은 작기도 하지만 볼품도 없고 그 흔한 비늘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습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두어 달만 반짝 인기를 얻다가 12월 강추위가 몰려오면 찾는 사람이 잦아듭니다.
전설에 따르면 동해 쪽으로 몽진(蒙塵)을 간 어느 왕이 먹을 것이 궁한 상태에서 이 생선을 맛있게 먹고는 이름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누군가가 ‘묵(목)’이라고 했다는데 왕은 생선 껍질이 은색이므로 “앞으로 은어(銀魚)라 불러라!” 했습니다. 환궁한 뒤 그 맛이 그리워 상에 올리라고 했으나 왕궁까지의 먼 길도 그러하고, 왕 역시 피란길의 허기진 배가 아닌지라 제맛을 느끼지 못하였을 겁니다. 실망한 왕은 이 맛없는 생선을 ‘은어’에서 도로 ‘묵’으로 하라 명해서 사람들은 ‘도로묵’이라 불렀고 이후 도루묵이 됐다고 알려졌습니다.
도루묵 제철에 제법 큰 놈을 구워 먹다 보면, 배 밖으로 탈출한 알들은 잘 익은 석류가 터진 모양새이고 낫토처럼 점액질 범벅이라 묘한 맛을 냅니다. 하나하나 씹히는 알의 식감 역시 매우 독특합니다. 도루묵 요리로는 찜, 찌개 등이 있지만 누가 뭐라 해도 저는 구이가 최고인 것 같습니다. 일단 미디엄 웰던 수준으로 구운 뒤 알을 먼저 먹고는 꼬리와 머리를 양손으로 잡아 남김없이 씹어 먹기도 하고, 머리와 뼈만 입으로 싹 발라내는 놀라운 기술을 구사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사철 알배기 도루묵을 내는 식당에선 제철임에도 냉동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 살이 퍽퍽하고 알도 박제된 것처럼 딱딱하며 점액질 역시 말라있음을 많이 봅니다. 서울 서초구 양재동 ‘어진’에서는 요즘 ‘멀쩡 도루묵’을 맛볼 수 있습니다. 동해안 별미인 명태 서거리깍두기는 덤입니다.
올해는 세계에 역병이 창궐하고 시국마저도 어수선한데 사람들은 권력과 부귀영화를 좇고, 서로 편을 갈라 악다구니합니다. 평소 거들떠보지도 않던 미천한 생선이 알려주는 세상의 진리, 그래봤자 산다는 것 자체가 ‘말짱 도루묵’임을 왜 잊고 사는 걸까요.
석창인 석치과 원장·일명 밥집헌터 s2118704@naver.com
○ 어진=서울 서초구 강남대로18길 15-11, 도루묵구이 3만 원, 도루묵찜(중) 3만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