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감독 영입-육성의 세계
황규인 기자
계약 기간이 끝나지 않은 코치를 ‘가을야구’ 도중 다른 팀 감독으로 보내주는 건 얼핏 이해하기 힘들다. 그래도 두산은 ‘차라리 빨리 보내주는 게 낫다’고 판단해 기꺼이 양해했다. 어차피 다른 팀 감독으로 가기로 돼 있는 코치가 팀에 남아있어 봤자 팀 분위기만 뒤숭숭해진다는 사실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시작은 한용덕 전 한화 감독(55)이었다. 한화는 두산과 KIA의 2017년 한국시리즈가 끝난 지 12시간도 지나지 않아 한 감독 선임 소식을 알렸다. 한 감독은 이미 한화로 가기로 약속한 상태에서 두산 수석코치로 한국시리즈를 치렀던 것이다. 두산은 이해 한국시리즈에서 정규시즌 1위 팀 KIA에 1승 4패로 무릎을 꿇었다.
이런 이유로 올해 두산은 김 감독을 먼저 SK에 보내주기로 결정했다. 김태형 두산 감독(53)은 “김 감독이 SK로 떠나는 게 솔직히 내가 좋아할 일은 아니다”라면서도 “빨리 가서 저쪽(SK) 스케줄도 짜야 할 것 같고 그래서 그냥 가라고 했다”며 웃었다.
○ ‘사단장’에서 ‘홀몸’이 된 감독들
LG 프렌차이즈 스타 출신으로 팀의 지휘봉을 잡게 된 류지현 LG 감독이 19일 취임 기자회견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렇게 포스트시즌 기간 중 감독 선임 사실을 발표할 수 있게 된 건 감독이 ‘홀몸’이 됐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감독 한 명을 선임하면 해당 감독 ‘사단’으로 통하는 코치진 여러 명이 감독을 따라 함께 팀을 옮기는 게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코치진과 입단 작업을 진행하는 절차도 필요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프런트 쪽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는 팀이 많기 때문에 감독 선임 발표 시기도 좀 더 유연하게 조절할 수 있다.
팀 무게중심이 프런트 쪽으로 기울어 간다는 건 구단 운영에서 세이버메트릭스(야구통계학)가 차지하는 비중이 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통찰력이 뛰어난 일부 지도자만 ‘감(感)으로’ 느낄 수 있던 것을 이제는 트랙맨 같은 첨단 측정 장비를 통해 누구나 ‘숫자로’ 확인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그러면서 ‘카리스마 넘치는 독재자형’이 다수를 차지했던 프로야구 감독 세계에서도 ‘데이터를 이해할 줄 아는 학구파’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 무명 선수+세이버메트릭스=명장
김원형 SK 감독
그리고 2018시즌이 끝난 뒤 이동욱 수비코치(46)에게 감독 자리를 맡겼다. 이 감독은 롯데 유니폼을 입고 6년간 143경기에 나서 통산 타율 0.221, 5홈런, 26타점을 기록한 게 프로 1군 기록의 전부였던 ‘무명 선수’ 출신이다. 그 대신 롯데에서 방출 사흘 만에 퓨처스리그(2군) 코치 자리를 제안할 정도로 성실한 선수였고, 팀 훈련이 끝나면 컴퓨터 학원으로 달려가 ‘마이크로소프트(MS) 엑셀’을 공부하던 학구파이기도 했다.
무명 선수 출신을 감독으로 기용하는 건 세이버메트릭스가 ‘기본 옵션’이 된 메이저리그에서는 흔한 일이다. 2020 메이저리그 30개 팀 감독 가운데 8명은 메이저리그 출전 경험이 전혀 없다. 김광현 소속팀 세인트루이스를 이끌고 있는 마이크 실트 감독(52)은 메이저리그는커녕 마이너리그 출전 경험조차 없다. 그 대신 아마추어 코치로 명성을 쌓았다. 실트 감독은 메이저리그 풀타임 감독 첫해였던 지난해 팀을 내셔널리그 중부지구 챔피언으로 이끌면서 리그 ‘올해의 감독상’을 탔고 이번 시즌에도 팀을 포스트시즌에 진출시켰다.
○ 초보 감독에게는 코로나19가 기회?
‘초보 감독’은 팀 살림살이에도 도움이 된다. SK 김원형 감독은 2년 총액 7억 원(계약금 2억 원, 연봉 2억5000만 원)에 계약했다. 염경엽 전 SK 감독은 올해 연봉만 7억 원이었다. 13일부터 LG 지휘봉을 잡게 된 류지현 감독(49)도 2년 총액 9억 원(계약금 3억 원, 연봉 3억 원)에 계약했다. 역시 류중일 전 LG 감독(57)의 계약 조건(3년 총액 21억 원)과 비교하면 절반도 되지 않는 금액이다.
한 수도권 팀 관계자는 “예산 절약하겠다고 초보 감독을 뽑는 팀을 없을 것”이라면서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각 구단이 인건비를 줄이고 있는 상황에서 도움이 되는 건 맞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올해는 포스트시즌 중에도 여러 구단으로부터 선수 방출 소식이 들려왔다. 이 역시 코로나 영향이 없다고 할 수 없다”면서 “인건비 문제로 우리 팀에서는 함께할 수 없지만 다른 팀에 가서 빨리 기회를 잡으라는 뜻으로 선수단 정리를 빨리 하는 케이스도 있다”고 설명했다.
다른 팀 관계자는 “솔직히 한국은 선수 풀(Pool)이 좁기 때문에 자유계약선수(FA)를 사오는 게 가장 확실하게 전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 길이다. 그러나 씀씀이를 줄여야 상황에서는 어떻게든 한 경기라도 더 이기려고 연구하고 또 연구하는 지도자에게 투자하는 게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비율)가 좋다. 각 팀이 감독 등 지도자 선임 소식을 알릴 때 ‘데이터에 대한 이해가 뛰어나다’고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말했다. 역대 FA 계약을 보면 총액 기준 100억 원이 넘는 선수만 5명이다.
○ 지도자 키우는 ‘코치 아카데미’
‘프랜차이즈 스타’가 ‘준비된 지도자’로 성장해 ‘우리 팀’에 승리를 안겨주는 건 모든 야구팬들의 희망사항이라고 할 수 있다. 19일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린 LG 류지현 감독 취임식에는 팬들이 ‘우윳빛깔 우리 감독님 꽃길만 걸으시길’이라고 메시지를 적어 보낸 화환이 눈에 띄었다. 류 감독은 LG 선수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이 팀 지휘봉을 잡았다. 1994년 LG 신인 1차 지명자 출신인 류 감독은 2007, 2008년 메이저리그 시애틀로 연수를 다녀온 기간을 제외하고는 선수와 코치로 줄곧 LG 유니폼만 입은 성골 중의 성골이라고 할 수 있다…
류 감독은 오히려 이런 경력을 경계한다. 그는 “한 팀에만 너무 오래 있으면 다른 팀 특징을 잘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가 될 수 있다”면서 “2007, 2008년에 연수를 떠날 때 구단에서 보내준 게 아니라 자비를 들였기 때문에 굉장한 용기가 필요했다. 그런데 결국 그 용기가 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된 배경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류 감독처럼 모든 선수가 자비를 들여 해외에서 지도자 연수를 받을 수 있는 여건에 있는 것도 아니다. 이에 한국야구위원회(KBO)는 ‘코치 아카데미’를 운영해 2년차 이하 초보 코치들이 데이터 분석, 스포츠 역학, 조직 관리 등을 공부하는 데 도움을 주기로 했다. 반응도 뜨겁다. 문정균 KBO 육성팀장은 “12월에 열리는 올해 코치 아카데미 신청자 접수를 마감한 결과 팀당 3명꼴인 30명 가까운 인원이 수강 신청을 했다”고 전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