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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하고 세심한 3분 터치로 다듬은 선의 미학

입력 | 2020-11-21 03:00:00

전승훈기자의 누드 크로키 체험기
눈-손 빨리 움직여 인체골격 파악
넓고 자세히 보는 세상이치 담아
몰입효과로 정신건강에도 좋아




붓으로 누드 크로키를 그리고 있는 한국화가 백범영 교수.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프랑스 파리에는 유서 깊은 누드 크로키 아카데미 ‘그랑 쇼미에르’가 있다. 모딜리아니, 샤갈, 자코메티, 호안 미로와 같은 유명 화가들도 다녔던 곳이다. 5년 전 파리특파원으로 근무하던 시절 친분이 있던 화가로부터 누드 크로키 강좌에 같이 가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학창 시절 이후로 한 번도 그림을 그려본 일이 없던 터라 자신이 없었고, 바쁜 업무에 치여 결국 포기했다. 올해 5월 초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갤러리 토포하우스에서 누드 크로키 아카데미 강좌가 열린다는 보도자료를 받았다. 파리에서 기회를 놓친 아쉬움이 남아 있던 것일까. 갤러리 측에 전화를 걸었다. “저 이거 배우고 싶은 데요!”


○ ‘선의 예술’ 누드 크로키
매주 목요일 퇴근 후 인사동을 찾았다. 수강생은 다양했다. 현직 화가도 있었지만 패션디자이너, 산업디자인과 교수, 사진작가, 필라테스 강사, 80대 제약회사 회장, 공무원…. 다양한 직종의 일반인이 인체 드로잉에 빠져 있었다.

모델의 동작을 그리는 데 주어진 시간은 3∼5분. 계속 포즈를 바꾸기에 눈과 손을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했다. 첫 그림은 겨우 얼굴 부분에 동그라미 하나 그리는 수준에 머물렀다. 그리는 사람은 아마추어지만, 모델은 프로였다. 모델은 포즈를 취하기 전에 스마트폰에 준비해 온 다양한 음악을 틀었다.

한 무용수 출신 모델은 한 편의 현대무용 같은 작품을 보여주기도 했다. 2시간 동안 고난도의 애크러배틱한 동작을 이어가다 마지막엔 막대 소품을 들고 배를 찌르는 듯한 비극적 몸짓으로 마무리지었다. 퍼포먼스의 감동을 제대로 화폭에 담지 못하는 실력이 안타까웠다. 남성 모델은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탄탄한 근육으로 다져진 몸을 스케치할 때는 살아있는 다비드상을 보고 있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6개월의 연습을 통해 누드 크로키는 ‘선의 예술’이라는 걸 깨우쳤다. 인체에는 수많은 선(線)이 있었다. 마른 모델에게선 척추와 갈비뼈, 고관절 등 마치 해부학 교과서를 보는 듯 날카로운 뼈의 라인이 선명했다. 풍만한 체형의 모델은 부드러운 곡선의 향연이었다. 안타깝게도 3분 안에 모든 선을 다 그릴 수는 없었다. 선택해야만 했다. 살아 움직이는 모델의 퍼포먼스에서 감정을 뒤흔든 선을 탐구하고 기록해 나갔다. 어느덧 내 그림에서 역동적인 움직임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전승훈 기자의 작품 2점.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누드 크로키는 명상과 집중을 하는 ‘선(禪)’ 수련과도 비슷했다. 3분마다 한 장씩 정신없이 그리다 보면 2시간이 훌쩍 지났다. 수강생인 채승진 연세대 산업디자인과 교수는 “공부할 때 3분을 하더라도 몰입하는 경우와 2시간 공부해도 딴생각을 한 사람은 차이가 나게 마련”이라며 “크로키 때의 ‘몰입효과’가 머릿속 잡념을 없애줘 정신 건강에 좋다”고 말했다. 팔순의 나이에 누드 크로키를 시작했다는 동구바이오제약 이경옥 회장(82)은 “회사 일로 바쁘다가도 그림을 그리면 평안해지고 힐링이 된다”며 “나이 들어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경험은 내 삶을 더 도전적으로 만든다”고 말했다.


○ “드로잉은 넓게 보고, 세밀하게 보는 훈련”
대부분 참가자는 연필이나 목탄으로 드로잉을 한다. 하지만 백범영 용인대 동양화과 교수는 먹물을 묻힌 붓으로 과감하게 인체의 곡선을 표현해내 보는 이들을 감탄하게 했다.

“드로잉은 손으로 그리는 게 아니라 눈으로 그려야 합니다. 무엇보다 관찰력이 중요한데 ‘관(觀)’은 넓게 보는 것이고, ‘찰(察)’은 세세하게 보는 것이죠. 인체는 먼저 크게 골격을 보고, 세심하게 조목조목 그려야 합니다. 이것은 음식을 요리하는 법, 기업체 경영에도 다 적용돼요. 그림을 그려 보면 세상의 이치도 깨닫게 됩니다.”

패션브랜드 ‘데무(DEMOO)’를 이끌고 있는 디자이너 박춘무 씨는 “패션이란 결국 사람의 몸에 옷을 입히는 작업”이라며 “관찰과 표현의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10년 넘도록 꾸준히 크로키를 그려왔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서 필라테스 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샤샤 정은 6년 전부터 누드 크로키를 시작해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그는 “인체 드로잉은 몸을 연구하기에 좋은 도구”라고 말했다. 이달 초에는 수강생들의 그룹 전시회도 열렸다. 똑같은 모델을 그린 그림들인데도 각자의 직업과 성향에 따라 개성이 달랐다. 누드 크로키를 지도하는 이은규 화백은 “그림은 ‘그리움’에서 태어난 것”이라며 “동굴벽화에서 누군가 그리운 사람을 잊지 않기 위해 가장 간단한 도구로 이미지를 남긴 것이 크로키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