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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라덴 사살 당시 ‘워룸’ 속 참모…‘바이든 첫 국무장관’ 블링컨

입력 | 2020-11-23 12:24:00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부 부장관과 임성남 외교부 제1차관, 사이키 아키타카(齊木昭隆)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왼쪽부터)이 19일 오후 서울 세종로 외교부 청사에서 열린 한미일 외교차관 협의회에서 악수를 하고 있다.(외교부 제공) 2016.4.19/뉴스1 © News1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외교수장인 국무장관에 토니 블링컨(58) 전 국무부 부장관을 지명했다고 22일(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이 다수의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바이든 첫 내각 국무장관에 내정된 그는 유태인 엘리트 집안 출신의 뼛속 깊은 ‘민주당 브레인’이다.

오바마 1기 행정부때 오사마 빈 라덴 사살 당시 전시상황실(워룸)에서 바이든 당시 부통령을 밀착 보좌하며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강성’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북핵에 대해서는 단호한 원칙주의자는 평가다.

지난 1990년대 초 빌 클린턴 대통령 때 백악관에 들어간 이후 민주당 행정부와 의회를 오가며 종횡무진 활동했다. 바이든 당선자가 상원 외교위원장 시절인 2007년을 전후로 당선자를 보좌하면서 깊은 인연을 맺었다.

◇원칙주의자, 쉽지 않을 ‘북핵 협상’…오바마 때 ‘빈라덴 워룸’ 막후 역할

블링컨은 민주당 행정부에서 북핵 저지를 위한 ‘한미일 3국 동맹’을 수차례 강조했고, 바이든 행정부 내에선 중국 견제를 위해 ‘3국 동맹 재건’에 힘을 쓸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북핵 문제에 있어서는 ‘단호한 원칙’을 강조한다. 지난 2016년 북한의 4차 핵실험으로 북핵 위기가 고조되자 대북제재 강화에 앞장섰고, 이 과정에서 청와대 안보실과 한미 고위급 전략회의를 5차례 가지며 한국과 호흡을 맞췄다. 이해와 소통에는 막힘이 없지만 원칙에는 단호하다는 평가가 있다.

종전선언과 관련해선 지난 2018년 6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1차 북미정상회담이 열릴 당시 뉴욕타임스 기고를 통해 “트럼프 대통령은 핵을 포기하기도 전에 평화조약을 논의하려는 북한의 바람을 들어주려는 것 같다”면서 “미국의 오랜 외교안보 정책과 배치된다”고 비판했다.

또 “이란 핵협상 당시 이란에 98% 농축우라늄 제거, 원심분리기 3분의 2 해체 및 봉인을 이끌어 냈다”고 언급, 향후 북핵 협상이 쉽지 않을 것임을 암시했다. 미국 언론 인터뷰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최악의 폭군 중 한 명”으로 부르기도 했다.

외교안보 부문에서 블링컨이 백악관에 미치는 영향력은 지난 2011년 빈 라덴 사살 작전 당시 워룸 사진이 잘 보여주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 바이든 부통령, 클린턴 국무장관, 군 수뇌부와 함께 사살 장면을 지켜보는 사진이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바이든 당선자는 오바마 대통령의 결단의 순간 빈 라덴이 현장이 있는지 끝까지 확인하자고 주장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에게 ‘자신을 믿으라’며 최후의 결단을 권했다고 한다. 그 막후에는 바이든 당선인의 ‘충복’ 블링컨이 있었다는 얘기가 워싱턴 정가에서 나온다.

◇유태인·부모 이혼·유복했던 10대…생부는 은행 갑부·새아버지는 세계적 변호사

블링컨이 민주당 지도부 핵심 브레인으로 자리 잡게 된 데에는 자신의 재능과 근면성, 원만한 성격이 배경이 됐지만 부모의 배경도 한 몫 했다.

블링컨의 생부 도널드 블링컨은 투자은행을 공동 설립할 정도로 성공적인 은행가였다. 민주당에 많은 금액을 기부해 클린턴 행정부 때 자신은 헝가리 대사로, 동생은 벨기에 대사로 발탁됐고, 아들 블링컨은 클린턴 대통령의 외교정책 스피치라이터 팀장으로 백악관에 입성했다.

생부가 블링컨에게 정치적 발판을 제공했다면, 새아버지 사무엘 피사는 그의 청소년기에 정신적 지주였다.

1962년에 태어난 블링컨은 8살 때 부모가 이혼했고, 일 년 뒤 모친을 따라 프랑스 파리로 이주해 새 아버지인 피사와 함께 살았다. 폴란드 출신 유태인박해(홀로코스트) 생존자인 피사는 이미 세계적인 변호사였고, 어린 블링컨에게 홀로코스트 생존담을 들려주며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영국 일간 더 타임스에 따르면, 블링컨은 피아니스트 아서 루빈스타인, 즉위 전 레이너 왕자·그레이스 켈리 부부가 사는 파리 도심의 호화 아파트에서 유복한 소년시절을 보낸 후 하버드 대학에 입학했다.

◇클린턴이 이어준 백악관 부부…바이든 13년 ‘충복’ 美외교 수장으로

30대 초반 백악관에 입성한 블링컨은 거기서 아내도 맞았다. 당시 영부인이었던 힐러리 클린턴의 일정을 담당했던 에반 라이언을 만나 결혼한 것. 2002년 미 상원 외교위원회 전문팀을 이끌었고, 2007년 상원 외교위원장을 지낸 바이든 당선자와 교분을 쌓았다. 2008년 대선에서 바이든 당선자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설 때 외교안보 고문으로 활동했다.

2013년 오바마 행정부 1기 말까지 바이든 부통령 전담 안보보좌관을 지냈고, 오바마 행정부 2기에서는 백악관 국가안보 부보좌관, 국무부 부장관을 역임했다. 지난 2016년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되자 공직을 떠났고, 2017년 미셸 플루노이 전 국방부 정책차관과 함께 워싱턴 안보전문 싱크탱크인 웨스트 이그젝 어드바이저스(WestExec Advisors)를 설립했다.

민주당 내에서 블링컨에 대한 평가는 호평 일색이다. 지적이고 근면한데다 품성까지 원만하다는 것. 클린턴 행정부에서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샌디 버거가 “어려운 일을 부드럽게 얘기하는 재능이 있다”고 평가할 정도다. 특히 어린 시절을 프랑스에서 지내 프랑스어를 원어민처럼 구사할 수 있어 바이든 당선인이 선호하는 ‘다자주의’를 잘 이해하고 있는 인물 중 하나라는 얘기가 나온다.

(서울=뉴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