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용득 만화가 그림
권용득 만화가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아이가 돌아오지 않았다. 걱정이 돼서 화장실을 갔더니 하필이면 그 식당 화장실 변기가 쭈그려 앉아서 볼일을 봐야 하는 수세식 화변기였다. 난생처음 화변기를 마주한 아이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얼굴빛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게다가 화장실은 나까지 들어가기에는 비좁았고, 결국 나는 아이를 첨부한 그림처럼 번쩍 들어 올려 볼일을 볼 수 있도록 도와야 했다.
지금은 웃어넘길 일이지만 그때는 아이를 화변기 속에 빠뜨릴까 봐 안간힘을 쓰며 버텼다. 물론 그건 아이가 그전까지 화변기를 한 번도 이용해 본 적이 없어서 벌어진 해프닝이다. 내가 아이만 했을 무렵에는 우리 집뿐만 아니라 공공장소 화장실도 대부분 화변기였고, 그 당시 화변기 이용자는 편하게 앉아서 볼일을 보는 양변기를 오히려 불편해했다. 말하자면 아이와 나 사이에는 그만큼의 세대 차가 존재한다.
문득 이건 웃어넘길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화변기에서 볼일을 볼 수 없는 아이와 앉아서 소변을 볼 수 없는 주변 남자들이 악순환을 거듭하는 우리 사회 세대 갈등의 한 단면을 에둘러 보여주는 것 같았다. 어느 한쪽에게는 너무 당연한 일이 다른 한쪽에게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데, 그걸 서로 좀처럼 이해하지 못한다.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참, 이 이야기는 아이에게 충분한 동의를 구하고 게재했음을 밝혀둔다. 이 이야기를 신문에 실어도 괜찮겠냐고 물었을 때 흔쾌히 허락해준 아이에게 이 자리를 빌려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다만 아이는 왜 흔쾌히 허락했을까. 만일 내가 이 이야기를 유튜브에 올린다고 했다면, 그래도 아이는 흔쾌히 허락했을까. 아이와 아이 또래 친구들에게 신문은 익숙하지 않은 예전 매체일지 모른다. 그걸 어른들만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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