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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가 할퀸 삶…무너진 부(富)의 사다리

입력 | 2020-11-24 03:00:00

직장 퇴직 40대, 공장 폐업 60대, 학업 중단 20대… 중산층의 추락




모두 마스크를 쓴 채 똑같은 일상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는 다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이웃들의 평범한 삶을 송두리째 바꾸고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의 가정 경제에 깊은 상처를 냈다. 공무원을 꿈꾸던 20대 청년은 생계를 위해 공사장을 나가고, 아들과 평범한 노후를 준비하던 60대 사장님은 일용직을 전전한다. 서울에 내 집 마련을 꿈꾸던 40대 가장의 목표는 이제 대출금 상환으로 바뀌었다. 실업률 등 통계지표 너머 현실 속의 대한민국 가족들을 만났다.

○ ‘한 달만 버티면 될 줄 알았는데…’ 중산층 꿈 접은 40대 가장

“초등학교 4학년 아들은 아빠가 집에 있어 좋다고 팔짝팔짝 뛰는데 제 속은 새카맣게 타들어갑니다.”

대학에서 관광경영학을 전공하고 외국계 항공사와 대형 여행사에서 일한 40대 가장 이모 씨(40)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3월 코로나19 사태로 다니던 여행사에서 전사적 휴직이 시작됐을 때만 해도 “한 달이면 직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두 달, 세 달이 넘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국가지원금이 나와 기본급여의 70%까지 지원을 받았는데도 손에 쥐는 돈은 300만 원이 채 안 됐다. 세 식구가 예전처럼 살 수는 없었다.

이 씨는 급한 대로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애완용품 도매업을 하는 지인의 창고에서 지게차 운전도 해보고 매제가 운영하는 수학학원 보조강사로 뛰어 단돈 몇만 원이라도 벌었다. 국가지원금 대상인 유급휴직자는 겸직을 할 수 없어 번듯한 다른 일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아내의 한숨 소리도 깊어졌다. 유아 놀이강사로 일하며 월 300만∼400만 원을 벌던 아내는 코로나19 이후 문화센터가 문을 닫자 소득이 사라졌다.

이 씨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아내와 둘이 한 달 800만 원을 벌며 이만하면 중산층이라 생각했다. 충남 천안에 집도 장만했다. 고속열차에 몸을 싣고 원거리 출퇴근을 하면서도 언젠가 서울에 내 집 마련을 하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 휴직 생활이 길어지면서 이 씨가 갚아야 할 대출금은 어느새 2000만 원으로 불었다. 그 와중에도 다락같이 오르는 서울 집값을 보며 중산층의 꿈은 잠시 접기로 했다.

이 씨는 지난달 회사에 희망퇴직을 신청했다. 주변에는 조금만 더 버텨보라고 했지만 여행업계가 좋아지길 더는 기다릴 자신이 없었다. 10월 30일 마지막으로 구조조정이 진행 중인 회사를 도망치듯이 빠져나왔다. 송별회 대신 친한 동료들끼리 간단한 저녁식사로 15년 여행업계 경력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 씨는 요즘 아는 사람이 운영하는 무인경비시스템 대리점에서 영업일을 시작했다. “열심히 하면 괜찮겠죠. 한동안은 옛 직장 근처를 가면 좀 울컥할 것 같아요.”

이 씨처럼 여행업계를 떠나는 이들이 줄을 이을 조짐이다. 6개월로 제한된 정부의 고용유지지원금이 끊기면 한계에 이른 여행사들이 본격적인 구조조정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관측이 나온다.

○ “휴지처럼 버려졌다” 백전노장 60대 사장님의 좌절

코로나19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이들은 바로 ‘사장님’들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직원을 두고 있는 자영업자 수가 1월 145만 명에서 10월 133만9000명으로 줄었다. 서울 양천구 신월동과 맞닿은 경기 부천시 지양로에서 만난 김복형 씨(66)도 그런 ‘사장님’ 중 한 명이었다. 그의 휴지공장이 있던 자리엔 오토바이 수리회사가 들어섰다. 자물쇠를 풀고, 옛 공장 자리를 보여주던 김 씨의 목소리는 떨렸다. “공장 기계들을 고철업체에 넘겼는데 200만 원 주더라고요. 10t짜리인데….”

이 자리에서만 휴지공장을 21년 운영했다. 휴지를 만드는 일만 40여 년. 그의 ‘휴지 인생’은 2020년 8월 말로 끝이 났다. 집 안 창고에 가득한 먼지 쌓인 휴지 재고만이 그의 과거를 기억하는 듯했다.

그는 외환위기 때도 돈을 벌었다. 휴지는 생필품인 데다 회사를 나와 자영업을 시작하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업소용 휴지 주문이 늘고 거래처도 넘쳐났다. 그때 번 돈으로 지양로 공장과 집도 장만했다. 코로나19 사태는 외환위기보다 더 무서웠다. 재택근무가 늘자 건물의 휴지 사용량이 줄었다. 거래처는 떨어져나갔다. 공장을 돌리기 위한 전기요금, 보험료, 각종 세금에 아들 인건비까지 생각하면 한 달에 400만 원 이상은 남아야 하는데, 나가는 돈이 들어오는 돈보다 더 많았다. 원래 있던 빚 3000만 원에 마이너스 통장으로 5000만 원의 빚이 더 불어났다. 8월 말 결국 폐업을 결정했다.

50년 가까이 허리가 휘도록 일했는데 이제는 빚 걱정을 해야 할 처지다. 당장 12월에 대출금 700만 원을 상환하고 다달이 80만 원씩을 갚아야 한다. 연금과 조금 들어오는 월세가 수입의 전부다.

그는 요즘 동생 소개로 서울 종로구 혜화동 교회 건설현장에서 일하며 하루 일당 12만 원을 번다. 동료는 모두 중국인이다. 마음 같아서는 매일 일을 나가고 싶지만 나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몸이 힘드니깐, 일주일에 많이 나가면 4일 나가요.” 김 씨의 요즘 걱정은 휴지공장을 같이 운영하던 아들의 미래다. “한창 나이인 40대인데 아직까지 일을 구하지 못했어요. 젊은 사람한테 나처럼 건설현장 나가자고 할 수도 없고…. 부모가 옆에서 보기 딱해요.”

○ 무엇을 할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미래가 막막한 20대

정모 씨(25)는 요즘 병원을 다닌다. 코로나19가 덮치기 전인 1월까지만 해도 그는 졸업한 뒤 행정고시를 준비하던 3년 차 고시생이었다. 모교인 고려대 도서관에서 하루 10시간 이상을 각종 수험서와 씨름하며 보냈다. 공무원 외에는 다른 길을 딱히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코로나19는 백면서생인 그를 생업전선으로 내몰았다. 다리를 다친 아버지를 대신해 ‘가장’ 역할을 해 온 어머니가 서울에서 운영하던 작은 여행사가 문을 닫았다. 단골 기업고객들에게 항공권 예약 등을 대행해주며 직원 4명의 월급을 주고 500만 원 이상을 집에 가져다주던 일이었다. 코로나19로 들어와야 할 돈은 들어오지 않았고, 나간 돈은 돌려받지 못했다. 어머니는 그걸 메우려 대출을 받았다. 결국 그의 이름으로 1700만 원의 빚이 생겼다.

생활비가 끊긴 데다 빚까지 불어나자 고시 공부를 접었다. 취업시장은 이미 한겨울이었다. 지난달 청년층(15∼29세) 실업률은 8.3%로 2년 만에 가장 높았다. 취업을 포기하고 ‘그냥 쉬었다’고 답한 20대 청년은 41만 명으로 1년 전보다 20.9% 증가했다.

그는 5월부터 충북 소도시 건축현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하고 있다. 시멘트도 바르고 트럭 운전까지 닥치는 대로 일한다. 한 달에 적을 때는 200여만 원, 많을 때는 400만 원 가까이 번다. 이 중 200만 원 정도는 집에 보내 빚을 갚고 있다. 정 씨는 “몸 쓰는 일이 처음이라 너무 힘들다. 연고도 없는 곳에서 하루 종일 일하다 보면 군대에 다시 와있는 것만 같다”고 말했다.

그러다가 정 씨는 쓰러졌다. 전기톱을 쓰다가 오른쪽 넷째 손가락을 다쳤다. 의사는 인대가 끊어지고, 뼈까지 손상됐다고 말했다. 손만 내밀면 들킬 일인데도 아직 부모님께는 다친 걸 말하지 못했다. 고시 공부를 다시 할지는 대출금부터 갚고 생각하기로 했다. 주식 투자로 돈을 벌었다는 친구들의 얘기는 딴 세상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병원 치료 받느라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할 여유도 없었어요. 하필이면 오른손을 다쳐서 더 앞이 잘 안 보이네요….”

장윤정 기자 yunj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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