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유럽은 계약금을 날릴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을 무릅쓰고 백신 개발 초기부터 구매 계약을 서둘렀다. 그 결과 미국은 지금까지 총 8억 회분의 백신을 확보했다. 1인당 2회 접종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해도 미국 인구 3억3000만 명을 모두 한 번씩 접종하고도 남는 양이다. EU 9억 회분, 영국 1억9000만 회분, 인도 5억 회분 계약에 이어 일본도 2억2000만 회분을 확보했다.
▷하지만 한국은 아직 구매 확정된 백신이 없다. 정부는 곧 뭔가 발표를 하겠다고 예고했는데, 정작 발표할 내용이 유동적인 궁색한 처지다. 제약사와의 구매 계약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고 계약이 체결되는 대로 결과를 공개하겠다고 하는데, 백신 확보가 굼뜨고 뒤처졌다는 비판을 얼마나 의식했으면 아직 협상 중이면서 계약 체결을 전제로 미리 발표 계획을 예고했을까 싶다.
▷정부가 최근 발표한 백신 접종 일정표는 다국적 제약사와 3000만 명분 구매계약을 올해 말까지 마무리하고 내년 하반기부터 국내 접종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년 하반기에 접종이 시작돼도 일반인은 더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치료제·백신개발 범정부 지원단’이 마련한 ‘접종 우선순위’ 검토안에 따르면 먼저 의사 간호사 등 보건의료인, 요양과 육아를 담당하는 돌봄종사자와 제조 물류 건설 배달업 환경미화 영역에서 대면노동이 불가피한 사회필수시설 종사자, 군인, 노인 등에 접종하고 그 다음 성인과 아동으로 확대한다.
▷‘K방역’으로 앞서갔던 한국이 정작 ‘백신 확보’ 경쟁에서는 선진국에 한참 뒤진 상태다. 보건복지부 장관은 가격 협상을 염두에 두느라 조급하게 계약을 서두르지 않았다고 하는데, 치료제가 없는 상황에서 백신 보급만큼 정부가 팔을 걷어붙여야 할 일이 또 있을까.
이태훈 논설위원 jeff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