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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고 선명한 사진만 진실일까?[전승훈 기자의 디자인&콜라보]

입력 | 2020-11-25 14:00:00


사진작가 민병헌



● 민병헌의 ‘새’ 사진전을 보고
구름 한 점 없이 날씨가 맑은 날. 스마트폰 카메라로 하늘을 찍으면 새파랗게, 단풍을 찍으면 타오르는 듯 붉게 나온다. 명암의 대비가 뚜렷한 원색(原色)의 향연! 누구나 폰카만 있으면 웬만한 프로 사진작가 못지 않게 찍어낼 수 있는 시대다.

그런데 서울 강남구 언주로 갤러리나우에서 만난 사진작가 민병헌의 사진은 달랐다. 다음달 2일까지 전시되는 민병헌의 ‘새’ 연작은 온통 희뿌연 사진들이다. 짙은 안개가 낀 바다 위, 구름이 잔뜩 낀 하늘, 눈인지 비인지 알 수 없는 진눈깨비가 내리는 호수에 새들이 날거나 앉아 있다.



“보통 사진을 찍는다고 하면 햇볕이 쨍한 날 오후 2시에 전봇대를 찍잖아요. 파란 하늘과 흰구름, 그림자의 밝고 어둠의 콘트라스트(대비)가 강렬하죠. 그런데 현실은 늘 그런가요?” 민 작가는 일상에서는 오히려 흐릿한 빛이 더 많다는 사실을 일깨웠다. 가령 침대에 누워서 밤에 불을 끄고 있으면 빛이 희미하게 비친다. 그는 70년대 말에 사진을 처음 찍기 시작할 때부터 ‘사진은 거짓말을 못한다’는 사실에 매력을 느꼈다고 했다.

“빛이 강한 것만 리얼리티가 있는 것일까요. 사진이란 결국 광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빛이 강하냐, 약하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새벽 안개가 꼈든, 눈과 비가 오는 날이든 어떤 날씨에서도 빛은 결국 사실입니다. 단지 광선이 굉장히 어두울 뿐이죠.”

그는 요즘도 철저히 필름카메라로 찍고 암실에서 인화하는 아날로그 작업만 한다. 디지털 기술로 새 한 마리쯤 넣고 빼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인 시대. 그는 컴퓨터 대신에 구름과 안개와 같은 날씨가 자연적으로 연출해주는 것만 이용할 뿐이다. 그래서 민 작가는 주로 비와 눈이 내리는 날에 카메라를 들고 나선다. 흐릿한 풍경을 찍느라 그의 카메라는 늘 습기에 젖어 있다. 그래서 몇 년 쓰지 못하고 고장이 난다.



“제가 중형카메라로는 ‘롤라이플렉스(Rolleiflex) 6008’을 씁니다. 옛날엔 핫셀블라드를 썼는데 암실작업을 해보면 콘트라스트가 너무 강하게 나왔어요. 제가 추구하는 사진과 달라 바꿨어요. 롤라이플렉스가 단종되기 전에 미리 3대를 사놨어요. 그런데 이미 다 고장이 났어요. 카메라는 비맞고 눈맞으면 습기 때문에 고장이 잘 나기 때문이죠.”

그의 작업실은 17년간 경기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에 있었다. 그는 양수리에서 새벽에 동트기 전에 안개가 진하게 꼈을 때 사진을 찍었다. 그는 5년 전부터는 전북 군산의 100년 된 고택으로 이사했다. 군산 인근의 서해 바다의 섬과 호수에서 새들을 찍는다. 그의 새가 있는 흐릿한 풍경 사진은 프랑스 출판사(Atelier EXB)에서 ‘DES OISEAUX’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됐다.

“저는 조류 연구가나 생태사진가가 아닙니다. 굳이 말하자면 어떤 대상을 보든지 화인 아트(Fine Art·순수 미술) 개념으로 보는 사람입니다. 하늘에서 새가 날아다니는 사진을 찍지만, 그것들이 이 화면 안에서 어떻게 아름답게 구성되는지에 관심이 있죠. 제 사진은 흐려서 가까이에서는 잘 안 보이지만, 오히려 조금만 떨어져서 보면 모든 것이 잘 보입니다.”

그래서일가. 어둑어둑하고 습기가 찬 듯한 그의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가라앉으면서 깊은 명상에 빠져든다.



“갈매기 한 마리가 제게 상당히 가까이 날아왔을 때 찍은 사진입니다. 저녁이라 어두운 톤이어서 잘 안 보였는데 자세히 보니까 새의 가슴에 털도 보이고, 새의 눈을 보니까 생각이 느껴지더라고요. 그게 누구의 생각일까. 갈매기의 생각일까. 내 생각일까. 필름을 보면서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되면 암실에서 빛의 강약을 조절하면서, 어떤 부분은 더 흐리게, 더 어둡게 하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 감정을 극대화시키는 거죠.”

그는 암실에서 작업을 할 때면 웬만하면 밖에 나오지 않는다. 하루, 이틀 넘게 밤을 지새우는 날도 많다. 그럴 때면 밥도 암실에서 먹고, 심지어 용변도 암실에서 본다고 한다. 그는 암실 밖으로 나와버리면 광선이 바뀌고, 감정과 정서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사진 작품은 뒤늦게 똑같은 버전을 만들어 낼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인화지랑 각종 약품이 달라졌을 뿐 아니라, 암실에서 느꼈던 감정을 다시 찾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암실에서 작업할 땐 어떤 기분인가요.

“암실에 들어가면 마음이 너무너무 편했습니다. 청소년기에 열등감이 반항심으로 이어졌고, 대학 때도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어요. 그런데 사진에 빠지기 시작하니까 헤어나지 못하겠더군요. 열등감, 소외감 같은 것이 나를 암실이라는 공간으로 몰아넣었던 것 같아요. 암실은 내게 도피처였습니다. 어두운 그 공간이 너무 좋았어요. 물론 공부 열심히 한다고 1등하는 건 아닌데, 전세계 누구도 나만큼 암실에서 오래 있던 사람은 없을꺼예요. 정말 무식한 이야기죠. 그 정도로 암실 안에 있는 시간이 좋았습니다. 젊었을 때는 식음을 전폐하고 암실에 있었죠.”

―군산으로 이사하신 이유는.


“원래 고향은 서울입니다. 5년 전에 촬영을 갔다가 마음에 드는 적산가옥을 발견했죠. 3년 동안 비어서 폐허처럼 돼 있던 집이었습니다. 군산의 구시가지가 너무 맘에 들었습니다. 제가 어릴적 종로5가 효제국민학교를 다녔는데, 서울이 대도시지만 당시만 해도 저녁 때가 되면 골목의 조용한 분위기가 있었어요. 낮은 건물 뒤로 해가 뉘엿뉘엿 질 때 아이들끼리 뛰어놀다보면 할머니가 욕을 하시면서 ‘밥차려 놨으니 빨리 들어와라’하고 소리치시죠. 군산의 도심지에 그런 분위기가 남아 있더군요. 시골에 전원주택 짓고 살 곳은 많아요. 그런데 도심인데도 그런 골목 분위기가 남아 있는 곳은 많지 않습니다. 더 늙기 전에 한번 살아보자는 생각이 들었죠. 앞으로 좀더 편안한 마음으로 다니면서 보는 풍경도 찍을 계획입니다.”


● 맺는 말
민병헌 작가의 사진을 보면서 내가 그동안 스마트폰으로 찍은 인물 인터뷰 사진이나 풍경사진을 되돌아보았다. 신문에는 늘 명확한 초점과 밝은 조명 아래에서 선명하게 찍힌 사진만 실린다. 초점이 나가거나, 안개가 낀 흐릿한 사진은 실릴 수가 없다. 인터뷰 사진은 가급적 야외의 태양광 아래서 클로즈업 해야 하고, 풍경사진도 맑은 날 총천연색으로 찍힌 사진을 쓰게 마련이다.

그런데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느날. 집으로 가는 아스팔트 길에 가로등 불빛이 비춰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마치 검은색 아스팔트에 작은 별들이 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순간적으로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어둡고도 흐릿하게 번지는 빛이 때로는 사람의 마음을 위로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승훈 기자가 찍은 ‘비오는 날의 아스팔트’.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