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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석에 들어서면 그는 스파이크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많은 타자들이 자세를 고정하기 위해 땅을 고르곤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류지현(176cm)은 키를 더 작게 만들어 스트라이크존을 줄이려고 그러는 것”이라고 했다.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그는 쉽게 볼넷을 얻어 1루로 나갔다. 누상에 나갔다 하면 빠른 발과 주루 센스로 상대 배터리를 쉴 새 없이 괴롭혔다.
덩치가 크지 않은데 홈런도 곧잘 쳤다. 신인이던 1994년 가장 넓은 서울 잠실구장을 안방으로 쓰면서도 홈런 15개를 때렸다. 대부분의 홈런은 홈플레이트에서 가장 가까운 왼쪽 펜스를 살짝 넘어갔다. 그 일대는 ‘류지현존’으로 불렸다. 1990년대 LG의 신바람 야구를 이끌었던 그는 ‘꾀돌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헌재 스포츠부 차장
화려한 선수 시절을 보냈던 그가 40년 가까운 야구 인생을 살면서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일은 2007년부터 2년간 미국으로 코치 연수를 떠났던 것이다.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이었다. 자기 돈으로 연수를 갔고, 현지에서 모든 걸 스스로 헤쳐 나갔다. 시애틀 산하 마이너리그 구단을 돌며 몸으로 배우고 익혔다. 그는 이때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은퇴 후 코치가 됐지만 선수들에게 뭘 어떻게 줘야 할지를 몰랐다. 하지만 2년간의 미국 연수를 통해 선수들에게는 기술보다 방향성을 제시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선수가 믿고 따르는 코치가 되려면 내가 더 많이 공부하고, 연구해야 했다.”
데이터의 중요성도 그때 깨달았다. 그는 “한국도 많이 달라졌지만 미국에서는 이미 그때부터 경기나 훈련 후 모든 선수의 기록을 데이터화했다. 클릭 한 번으로 선수에 대한 모든 정보를 알 수 있었다”고 했다. 다시 LG로 돌아온 뒤 그는 수석 코치와 수비, 주루 코치 등을 지내며 선수들을 키웠다. 데뷔 초기 ‘돌 글러브’에 가깝던 오지환을 리그의 수준급 유격수로 키워낸 게 대표적이다.
올 시즌을 마지막으로 류중일 감독이 물러난 뒤 LG는 새 감독을 선임하며 여러 기준을 제시했다. 데이터와 소통, 그리고 팀 운영 철학이었다. 모든 면에서 류지현은 ‘준비된 감독’이었다. 최종 면접에서 5 대 1의 경쟁을 뚫고 LG 사령탑으로 낙점된 그는 “누구든 모를 수 있다. 하지만 모르는 걸 인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답을 구해 와야 한다. 선수들은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지도자를 더 이상 인정하지 않는다”고 했다. 시대가 변했고, 야구도 달라졌다. 야구도 이제는 끊임없이 배워야 하는 시대가 됐다. 이제는 그간의 배움을 성적으로 증명하는 일만 남았다. LG가 마지막으로 우승한 해는 그가 신인이던 1994년이다.
이헌재 스포츠부 차장 u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