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명인열전 <97>양진성 임실필봉농악 보존회장
인간문화재인 양진성 전북 임실필봉농악 보존회장이 꽹과리를 치며 농악대를 이끌고 있다. 양 회장은 1995년부터 임실군 강진면에 있는 필봉문화촌에서 전통을 지키고 있다. 필봉농악보존회 제공
상쇠 아버지가 꽹과리를 치고 춤을 추면 코흘리개 아이는 흥을 돋웠다. 아버지의 삶을 동경하면서도 젊은 시절 아버지와는 다른 꿈을 꿨다. 뜻하지 않은 낙향 그리고 필봉지기의 삶을 산 지 어언 25년. 놀이에 가까웠던 농악은 천직(天職)이 됐고 꽹과리를 잡던 손은 굳은살이 제 살이 된 지 오래다.
국가무형문화재 11-5호인 양진성 전북 임실필봉농악 보존회장(54)은 그렇게 삶의 여정을 꿋꿋이 이어왔다. 대를 이어 필봉농악을 잇고 있는 양 회장을 10일 임실군 강진면 필봉리 필봉문화촌에서 만났다.
○ 가난했지만 놓을 수 없었던 농악
필봉문화촌은 필봉농악과 1995년 작고한 아버지 양순용 상쇠가 1988년 각각 무형문화재와 인간문화재가 되며 정부와 자치단체가 지어준 2층짜리 전수관이 토대가 됐다. 한옥과 비닐하우스 몇 채로 시작했으나 이제는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전통문화시설로 자리매김했다. 연간 수만 명이 찾아오고 전통문화를 이으려는 문화예술인과 공무원의 벤치마킹 대상 1호가 됐다. 양 회장이 젊음을 고스란히 바치고 임실군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농악은 공동체의 삶을 살면서 생기는 갈등을 풀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고 아버지는 생각했어요. 어우러지면서 해묵은 감정을 털어내는 거죠. 이것을 지키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 여기셨고요.”
열네 살에 상쇠가 된 아버지는 평생을 농악과 함께 살았다. 6남매를 돌보고 농사를 짓는 일은 어머니(83) 몫이었다. 양 회장도 소를 키우고 지게질도 하면서 힘을 보태야 했다.
갈담초등학교 3학년 때 농악부가 생기면서 상쇠를 맡았다. 어머니에게는 1년 동안 비밀로 했다고 한다. 양 회장은 “학교도 제대로 못 갈 형편이었으니 농악을 한다고 말을 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대회에 나가 상을 타면서 어머니는 아들이 농악을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무랄 줄 알았지만, 어머니는 말없이 농악을 할 때 입는 바지저고리에 색색의 조끼, 삼색 띠를 손수 지어주며 아들을 응원했다.
○ 연주자가 아닌 다른 꿈을 꾸다
1978년 김덕수와 함께 사물놀이 패를 만든 상쇠 김용배 씨(1986년 작고)는 양 회장의 아버지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필봉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다 보니 당시 중학생이던 양 회장과 가까웠고 누구보다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
“아버지한테 저를 서울로 데려가고 싶다고 하셨어요. 국립전통예술고에 다니게 해 더 큰 사람으로 키워 보겠다고 했지만 집안 형편 때문에 갈 수가 없었어요.”
양 회장은 경남 남해군에 있는 남해고에 입학했다. TV로 필봉농악을 접한 이 학교 농악부 교사가 찾아와 입학을 권유했다.
“일종의 스카우트여서 학비 걱정은 없었어요. 무엇보다 호남농악과는 다른 영남농악을 배우며 꽹과리를 칠 수 있어 좋았어요. 그런데 농악으로 먹고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은 떠나지 않더라고요.”
결국 대학에 진학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가 되면 농악을 가르치며 순탄한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방대 국악과에 입학해 국악개론 수업을 듣던 중 아버지를 다시 알게 됐다. 아버지의 꽹과리와 징소리를 들으며 벅차올랐던 유년 시절이 떠올랐다. 전문 연주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전북도립국악원에 들어갔다.
“친하게 지내던 분의 소개로 한 선생님을 알게 됐어요. 선비 같은 올곧음이 있었고 국악에 대한 이해도 높으셨죠. 역사적 아픔을 갖고 사는 이들을 문화로 위로해야 한다는 말에 무작정 따라 나섰습니다.”
일 년 중 상당 기간을 중앙아시아에서 머물며 현지인과 강제 이주라는 역사적 아픔을 겪은 고려인들에게 전통음악을 전했다. 한국에서는 프리랜서 연주자로 활동하며 나름 이름도 알렸다.
○ ‘전통문화 지킴이’ 필봉지기의 삶
필봉과 맺어진 인연은 질겼다. 인간문화재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아버지가 1995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당시 양 회장은 소련에 있었다.
“급히 귀국해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다시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중앙무대에 설 자신이 있었기에 필봉에 내려올 생각이 없었어요.”
그를 붙잡은 건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그렇게 좋아하던 농악이 문화재로 지정돼 이제 빛을 보는가 했는데 아버지가 세상을 등졌으니 필봉농악도 없어질 것”이라고 탄식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필봉으로 돌아왔다.
“농악은 ‘정착문화의 꽃’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지만 직업이 되기는 어려워요. 공연을 하려면 최소 20명은 있어야 하는데 농악만으로는 밥벌이가 안 되니 누가 농악을 배우려고 하겠습니까.”
고향으로 돌아온 양 회장은 필봉농악 대중화를 위해 ‘필봉전통문화 체험학교’를 열었다. 최소한 먹고사는 문제라도 해결해야 필봉농악과 전통, 그리고 사람도 지킬 수 있다고 여겼다. 초중학생에게 풍물을 가르치는 상주 단원이 5명에서 지금은 22명까지 늘었으니 그 꿈을 어느 정도 이룬 셈이다.
그는 필봉농악의 역사를 마당극처럼 만들어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해마다 공연을 각색해 다른 재미를 선보였다. 한 해 20여 차례 90분짜리 공연이 열리는 날이면 시골 마을이 북적북적한다. 올해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영상으로 관객과 만났다. 2004년부터 원광디지털대에서 전통공연예술학과 교수로 후학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양 회장과 단원들의 노력으로 지난해에만 3만4000여 명이 문화촌을 다녀갔다. 해외에서 오는 이들도 한 해 1000명이 넘는다. 필봉농악을 지키며 쉼 없이 살아온 양 회장은 아버지에 이어 2008년 인간문화재가 됐다.
그에게는 아직도 숙제가 남아 있다. 농악을 보존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많은 이들이 즐길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생활문화로서 자리매김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필봉농악을 배우고 연마한 젊은 전승자들이 농촌에 남아 ‘문화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토대를 튼튼히 하는 일도 목표다.
“급변하는 사회를 살면서 전통을 지키는 것은 희생이 따릅니다. 우리 것을 지키는 이들이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하고 주저앉지 않도록 관심과 지원이 필요합니다. 이게 바로 전통문화를 꽃피우고 문화강국으로서 입지를 다지는 길이 아닐까요.”
박영민 기자 minpres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