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노크 귀순’ 이후 군은 철책에 과학화 경계시스템을 도입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신규진 정치부 기자
일단 군에서 판단한 A 씨의 월책 경위는 이렇다. 먼저 철책 기둥을 타고 올라간 A 씨는 철책 상단의 ‘Y피켓’(Y자 모양의 긴 쇠막대)에 안착했다. 통상 Y피켓엔 일정 무게 이상의 하중이 가해지면 경보가 울리는 ‘상단감지 브래킷’이 달려있지만 그가 넘은 철책엔 이 장비가 설치돼 있지 않았다. 더욱이 Y피켓 가장 끝부분에 달려 있던 또 다른 상단감지센서는 나사가 풀려 있어 A 씨가 철책을 넘는 와중에도 경보를 울리지 않았다.
몸무게 50kg에 북한에서 기계체조 선수였던 A 씨의 민첩함으로만 이 사건을 설명하기엔 과학화 경계시스템의 구멍은 생각보다 컸다. 무엇보다 상단감지센서에 대한 점검은 5년간 한 차례도 이뤄지지 않았다. 분단의 최전선에 2000억 원짜리 장비를 설치하고도 군은 체계적인 관리 매뉴얼조차 제대로 수립하지 않은 것이다.
군은 그간 ‘물샐틈없는’ 과학화 경계시스템을 맹신해왔다. 하지만 이번 사건으로 지난해 아프리카돼지열병(ASF) 창궐 당시 “멧돼지도 뚫고 올 수 없다”던 정경두 전 국방부 장관의 말도 무색해졌다. 전방지역 장병들의 노고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최전방에서 과학화 경계시스템이 관리 소홀로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 상황에서 변명만 늘어놓는 군의 태도에 쓴소리가 나오는 게 사실이다.
군은 뒤늦게 장비 전수조사에 나섰지만 이미 군 내부에선 과학화 경계시스템 무용론이 만연하다. 제2, 제3의 월책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경계 효능에 대한 전면 재검토와 사후관리가 이뤄져야 한다. 사람이 닿아도 울리지 않는 2000억 원짜리 장비 때문에 조국 수호를 위해 불철주야 애쓰는 장병들의 노고를 헛수고로 만들어서야 되겠는가.
신규진 정치부 기자 newj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