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좌절과 영광의 바다[김인현의 바다와 배, 그리고 별]〈41〉

입력 | 2020-11-27 03:00:00


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선장

바다 경력 60년. 누구보다 바다 관련 에피소드가 많다. 20세에 해양대에 입학했으니 그때부터 40년이다. 우리 집의 가업이 수산업이었다. 수산업을 그만둔 때인 초등 4학년까지는 선주의 손자로서 이런저런 바다 관련 체험을 많이 했다. 초등 4학년부터 20세까지는 아버지가 어선에 페인트칠을 하셨다. 아버지를 도와 100척 이상의 어선에 페인트를 칠했으니 분명 바다 경력이다.

‘통통통통’ 기관 소리가 멀리서 들린다. 새벽 4시경이다. 어른들은 어판장으로 나가셨다. 날이 밝아지면 화장이라는 사람이 큰 상자를 하나 들고 집으로 들어온다. 상자에는 그날 어획한 대표적인 생선이 들어 있다. 대구, 꽁치, 새우, 물가자미, 도루묵 등이다. 대구가 배달되는 날 가족들은 대구는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며 좋아하셨다. 대구탕을 시원하게 해 먹었다. 아가미젓, 알젓, 창난젓도 만들었다.

‘보링구’와 ‘자다’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궁금했다. 기관실에 있는 기관을 뜯어서 주기적으로 철공소에서 수리를 할 때 어른들이 ‘보링구’를 한다, 어선 한 척을 1년간 ‘자다’해 온다고 했다. 해양대에 다니면서 보링구는 보링(boring·기관의 피스톤 청소), 그리고 자다는 차터(charter·배를 빌림)의 일본식 발음임을 알게 되었다. 어선에 페인트를 칠하면서 아버지는 유독 선박의 측면 중간의 선(線)을 중심으로 주의 깊게 페인팅을 했다. 이 선은 선박이 최대로 잠길 수 있는 흘수선이다.

7세 때 어선을 직접 타고 바다로 나가기도 했다. 배가 얼마나 흔들리는지 멀미가 났다. 배를 처음 타는 사람은 상선에서도 선수에 나가 있도록 한다. 이렇게 흔들리는 경험을 하고 나면 다음부터는 멀미가 나지 않는다. 그 덕인지 해양대 실습 기간에 실습선이 너무 흔들려서 모두 멀미를 했지만 나 혼자 멀쩡했다. 강인하다는 인상을 동기생들에게 남겼다. 모두 가업인 수산업 덕분이었다.

우리 집은 25년간 수산업에 종사하다가 도산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있었던 어선 대경호 좌초 침몰사건이 결정타였다. 매일매일 만선의 꿈을 꾸었지만 우리 배는 매번 허탕을 치고 돌아와 그 꿈이 허망한 것임을 알려주었다. 아버지는 “수산업은 재산의 30%만 투자해야 한다. 바다 밑은 알 수 없으니 다른 사업과 반드시 같이 해야 한다”는 교훈을 나에게 남기셨다. 그 덕분에 나는 해운회사의 포트폴리오(분산투자)를 눈여겨보는 안목이 생겼다. 수산업에 실패한 후 13명의 대가족이 살아가기가 막막했다. 아버지는 어선에 페인트칠을 하기 시작했고, 아들은 돈벌이가 좋다는 해양대에 진학했다. 부자가 바다에서 재기의 길을 찾은 것이었다.

바다는 좌절과 안타까움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영광의 원천이기도하다. 1945년 조부님이 어선 한 척과 함께 귀국해 고향에서 수산업을 시작하면서 바다로부터 영광이 시작되어 20년간 지속되었다. 나의 자부심의 상징인 선장 타이틀도 바다로부터 왔다. 줄곧 해상법을 연구하고 강의하며 결코 바다를 떠나지 않았다. 나는 60년간 바다와 함께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바다는 내가 있도록 운명지어진 자리이기 때문이다.

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