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나라의 앨리스/루이스 캐럴 지음·존 테니얼 그림·이소연 옮김/336쪽·7700원·펭귄클래식코리아

어찌 된 영문인지 갑자기 손을 맞잡고 내달리기 시작한 두 사람. 붉은 여왕이 앨리스를 재촉하며 거듭 소리친다. 왜 뛰어야 하는지 물어볼 겨를이 없을 만큼 전력으로 뛰는데도 주변의 모습에는 변화가 없다. 뜬금없는 달음박질을 겨우 멈춘 뒤 주저앉아 헐떡이던 앨리스가 외친다.
“아까 우리가 서 있던 나무 아래잖아요! 모든 게 전과 똑같아요! 내가 사는 나라에서는 오랫동안 계속해서 빨리 달렸다면 어딘가 다른 곳에 가 있어야 해요.”
“이 나라에서는, 같은 장소에 머물러 있으려면 네가 낼 수 있는 최고 속력으로 계속 달려야 해. 다른 장소로 가고 싶다면 적어도 그 두 배는 더 빨리 달려야 하고!”
루이스 캐럴이라는 필명을 사용한 영국 옥스퍼드대 수학 교수 찰스 루트위지 도지슨이 1871년 발표한 이야기의 일부다. 1973년 미국 생물학자 리 밴 베일런은 진화가 더딘 종이 도태하는 까닭을 설명하며 이 부분을 인용했다. 1996년 윌리엄 버넷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 교수도 경쟁을 통한 기업 성장 모델을 제시하며 같은 부분을 인용했다.
그 뒤 허다한 글이 두 학자의 인용 사례를 다시 인용하면서 이 이야기에는 진화 또는 경쟁의 필요성과 연결되는 이미지가 입혀졌다. 하지만 작가가 되살아나 후대 학자들의 글을 접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럴싸하긴 한데 이런 의미로 못 박지 말아 달라’고 하지 않을까. 뜀박질에 대한 여왕의 설명을 듣고 난 앨리스가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내놓은 대답은 이랬다.
“그렇다면 난 다른 데로 가지 않을래요. 난 여기 머무르는 것에 만족해요. 그저 목이 많이 마르네요!”
앨리스가 뭘 바라는지, 여왕은 사실 아무 관심도 없었다. “국민들이 바라는 개혁을 이루겠다”고 온종일 외치는 TV 속 사람들은 그런 여왕을 많이 닮았다. 국민은 질병과 사고와 범죄의 위협을 조금씩이라도 줄이고자 애쓰는, 목마른 이에게 건넬 물병을 준비하는 나라를 원한다. 그러나 세금은 불필요한 토목공사, 의문스러운 에너지 사업, 위험천만한 교통수단 사업으로 흘러간다.
여왕이 다시 앨리스에게 묻는다.
“과자 하나 더 먹을래? 갈증은 좀 가셨지?”
앨리스는 대꾸할 말을 잊는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