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4월 19일
플래시백
“동양평화? 그건 일본이 한국을 강제로 합병함으로써 한 귀퉁이가 깨지고 말았습니다. 합병은 일본의 먼 장래를 위해서도 큰 실책입니다. …”
이듬해 와세다대 정치경제학과를 차석 졸업하고 귀국한 이 청년은 조선총독부 관리 제의를 거절하고 홀어머니를 모십니다. 하지만 곧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상하이에서 몽양 여운형 등과 신한청년단을 결성해 활동하죠. 1919년 국내에 잠입했다가 3·1운동 직전 체포됐지만, 일본 요인들의 초빙으로 도쿄를 방문하게 된 몽양이 통역으로 그를 고집한 덕에 다시 세상에 나와 민족지 창간에 몰두합니다.
동아일보 창간의 주역이자 독립운동가, 정치가였던 설산 장덕수. 가세가 기울어 관청 급사로 일하며 독학해 일본 와세다 대학에 입학한 그는 1916년 이 대학 정치경제학과를 차석으로 졸업했다.(왼쪽 사진) 1923년 동아일보 특파원 신분으로 미국 유학길에 오른 장덕수는 컬럼비아 대학에서 ‘영국 산업평화에 대한 방법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가운데) 장장 13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해 보성전문학교 강단에 섰던 그는 광복 후 정치에 뛰어들어 한국민주당 외교부장, 정치부장을 지냈다.(오른쪽)
그러자 일제 말고도 내부의 적이 생겨났습니다. 함께 청년운동을 하던 일부 사회주의 세력이 ‘반장(反張·반 장덕수) 운동’에 나선 겁니다. 한참 뒤 누명을 벗었지만 소련의 레닌이 준 거액을 착복했다는 모함까지 받았습니다. 요즘 말로 ‘멘붕’이 왔을 법한 그에게 동아일보는 미국특파원 발령을 냅니다. 해외통신원 대신 본사 기자들을 상주특파원으로 내보내면서 미국엔 부사장급 인사를 파견하기로 한 거죠. ‘자유의 땅’ 미국에서 공부도 더 하라고 권합니다.
동아일보는 1923년 4월 19일자 1면 ‘본보 장덕수 주필을 보내며’에서 ‘창간 이후 3년간 올바른 논지를 펴고 큰 붓을 휘두른 그의 활약이 긴요한데 장대한 뜻을 결행하니 연모의 마음이 절실하다’며 그의 부재를 아쉬워합니다. 장덕수는 이날 경성을 출발해 부산, 도쿄를 거쳐 요코하마에서 출발하는 배에 올랐습니다. 미국 땅을 밟은 것이 5월 16일이었으니 거의 한 달이 걸린 긴 여정이었습니다.
어머니 김현묘 여사(왼쪽), 여동생 덕선과 함께 한 장덕수. 김 여사는 덕준, 덕진 두 아들을 더 뒀지만 동아일보 창간 동인 덕준은 1920년 11월 간도에서 일본군의 동포 학살을 취재하다 영영 돌아오지 못했고, 만주에서 독립운동에 몸 바친 덕진 역시 1924년 8월 상하이에서 순국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던 장덕수는 민족중흥의 꿈을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한 채 1947년 12월 2일 흉탄에 맞아 절명했다. 8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거행된 영결식에서 수많은 인파가 그의 운명을 애도하고 있다.
정경준 기자 news91@donga.com
원문
本報(본보) 主筆(주필) 張德秀(장덕수) 君(군)을 送(송)함
本社(본사) 特派(특파)의 米國(미국) 視察(시찰)
勿論(물론) 滿天下(만천하)의 讀者(독자) 諸君(제군)이 熟知(숙지)하는 바와 如(여)히 張(장) 君(군)은 本報(본보) 創刊(창간) 以來(이래)로 本報(본보)의 主筆(주필)이엿스며 그間(간) 三個(삼개) 星霜(성상)에 亘(긍)하야 侃¤(간악)의 論(논)과 椽大(연대)의 筆(필)을 盛揮(성휘)하고 社會(사회) 文運(문운)의 啓發(계발)에 努力(노력)한 것은 吾人(오인)이 玆(자)에 多言(다언)을 不要(불요)할 바로다. 또한 本社(본사)의 社運(사운)이 今日(금일)의 發展(발전)을 致(치)케 된 것도 同(동) 君(군)의 力(역)에 俟(사)한 바 多(다)한 것이 事實(사실)이로다.
그러고 目下(목하) 우리 社會(사회)에 思潮(사조)의 混亂(혼란)이 極度(극도)에 達(달)하고 諸般(제반)의 施設(시설)이 零替(영체) 顚倒(전도)하야 思想(사상) 指導(지도)의 責(책)과 社會(사회) 革新(혁신)의 役(역)에 同(동) 君(군)의 活躍(활약)이 더욱더욱 喫緊(끽긴) 重大(중대)하거늘 同(동) 君(군)이 이제 數年(수년)을 期(기)하야 朝鮮(조선) 全(전) 社會(사회)의 囑望(촉망)과 또 偏侍(편시)의 慈愛(자애)를 暫離(잠리)하야 米國(미국) 留學(유학)의 壯志(장지)를 決行(결행)한 것은 一種(일종) 悵戀(창연)의 懷(회)가 切實(절실)하도다.
그러나 同(동) 君(군)의 志(지)는 임이 朝鮮(조선)을 爲(위)하야 憂愛休戚(우애휴척)이 同一(동일)한지라 同(동) 君(군)이 朝鮮(조선) 內(내)에 在(재)하나 或(혹)은 朝鮮(조선)의 外(외)에 向(향)하나 그 所志(소지)가 同一(동일)하며 그 努力(노력)이 一樣(일양)일 것은 엇지 吾人(오인)의 贅言(췌언)을 可待(가대)할 바이리요.
다만 同(동) 君(군)이 過去(과거) 數年(수년) 間(간)의 劇務(극무)에 心身(심신)이 多焦(다초)하얏슬 것을 窃想(절상)하는 바어니와 바라건대 自由(자유)의 鄕國(향국) 亞米利加(아미리가) 新天地(신천지)에 刷新(쇄신)의 靜力(정력)과 滿腹(만복)의 蘊奧(온오)를 培養(배양)하야 滿天下(만천하) 人士(인사)의 囑望(촉망)을 副(부)케 하기를 切願(절원)하며 水陸(수륙) 長途(장도)에 心身(심신)이 保安(보안)하기를 祈(기)하노라.
현대문
본보 장덕수 주필을 보내며
본사 특파의 미국 시찰
본보 주필 장덕수 씨는 본사가 특파하는 미국 시찰을 위해 19일 오후 경성을 출발해 오는 28일 요코하마 항을 배로 출발해 멀리 미국을 향할 예정이다.
물론 만천하 독자 여러분이 숙지하는 것과 같이 장 씨는 본보 창간부터 본보의 주필이었으며 그동안 3년 동안 올바른 논지를 펴고 큰 붓을 휘둘러 사회의 학문·예술 계발에 노력한 것은 우리가 여기서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또한 본사의 사운이 오늘날의 발전에 이르게 된 것도 장 군의 힘에 의지한 바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목하 우리 사회 사조의 혼란이 극도에 이르고 제반 시설이 보잘 것 없이 뒤죽박죽이 돼 지도의 책임과 사회 혁신의 임무에 장 군의 활약이 더더욱 긴요하거늘 그가 이제 수년 예정으로 조선 전 사회의 촉망과 쏠리는 자애를 잠시 떠나 미국 유학의 장대한 뜻을 결행하니 일종의 슬픈 연모의 마음이 절실하다.
그러나 조선을 위한 장 군의 근심, 사랑, 안락과 걱정은 매한가지라 그가 조선에 있으나 조선 밖을 향하나 뜻한 바는 동일할 것이며, 노력도 한결같을 것임은 어찌 우리가 군더더기 말을 기다릴 바이겠는가.
다만 장 군의 몸과 마음이 과거 수년간 극심한 격무에 타들어갔을 것임을 남몰래 생각하는 바이니 바라건대 자유의 고향 아메리카 신천지에서 쇄신의 정력과 가득한 학문과 지식을 배양해 만천하 인사의 촉망에 부응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수륙 장도에 심신이 안녕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