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동 뉴욕 특파원
얼마 전 A 씨에게 다시 연락을 해봤다. 과연 패배를 인정하는지가 궁금했다. 바로 답장이 왔다. “당신이 미국 헌법을 모르는 모양인데 개표 사기의 근거는 엄청나게 많다”면서 뉴스 링크를 몇 개 보내줬다. 그러고는 “내년 1월 20일 트럼프는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다. 장담한다!”고 했다. 그가 보낸 기사들을 확인해 봤다. “우편투표는 사기다”, “가짜 투표용지가 섞여 있다”는 식의 익숙한 내용이었다.
그에게 “당신이 보낸 건 의혹일 뿐 증거는 아니지 않으냐”고 되물었다. 친절하던 그가 이때부터 거칠어졌다. 그는 “당신은 지금 좌파 논리에 빠져 있다. CNN 좀 그만 봐라”면서 트럼프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사기 혐의로 기소된 스티브 배넌의 동영상을 첨부했다. 내가 “당신의 분노는 이해한다. 그래도 최소한 인종차별이 나쁘다는 정도는 동의하지 않느냐”고 했더니 그야말로 비수가 돌아왔다. “그런 당신네 한국은 얼마나 다문화사회냐. 날 가르치려 하지 마라. 전 세계 언론은 다 죽었다. 악취가 난다.”
세계화 과정에서 미국의 저학력·저소득 백인들이 일자리를 잃고 공동체가 파괴되는 피해를 입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이는 요즘 영화로 나와 더 유명해진 ‘힐빌리의 노래’ 같은 책에도 자세히 묘사돼 있다. 오랫동안 방치된 그들의 소외감을 달래준 것은 워싱턴 정가의 실력자가 아닌 ‘정치 신인’ 트럼프였다. 록스타를 방불케 하는 엄청난 팬덤 앞에서 그의 거친 인성과 막말, 심지어 범죄 혐의조차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지자들의 절대적인 믿음은 상대에 대한 분노, 언론 불신으로 이어졌고 대선 패배에 직면해서는 초유의 불복이라는 더 파괴적인 형태로 진화했다.
결국 A 씨와는 대화를 이어 나가지 못했다. 미국이 어쩌다 이렇게 됐나, 요즘 자주 하는 그 말이 또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트럼프의 팬들이 패배를 부정하면 안 되듯이, 이들 7400만 명의 존재를 무시해서도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이들을 이해하지 못하면 미국 전체를 이해할 수는 없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힘없고 소외된 자들의 분노를 제때 감싸 안지 못한 게 깊은 분열의 씨앗이 됐다는 점을 미국은 뒤늦게 깨닫고 있다. 왠지 남 얘기 같지가 않다.
유재동 뉴욕 특파원 jarret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