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즉시 성으로 돌아간 정발은 군병을 소집하고, 주민을 성 안으로 대피시켰다. 몇 척 되지 않았지만 적에게 노획되지 않도록 포구의 전함을 침몰시켰고, 성벽에 병사를 배치하고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짧은 시간 동안 당황하지 않고 할 도리를 다한 것을 보면 그는 유능한 장군이었던 것 같다.
정발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선조 대에 비변사가 무관 중에서 유망주 명단을 뽑아 올릴 때 정발이 포함되어 있었다. 1589년 정발이 북방 국경지역에서 몰래 조선 영토로 잠입한 여진족 몇 명을 사살하는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부산진 첨사로 발령받은 것이 아닌가 싶다.
정발과 부산진의 병사들은 그 의무를 다했다. 그 저항의 시간이 하루에 불과했지만, 일본군은 1만8600명이었고, 부산진성의 병력은 겨우 600명이었다. 이 병력으로는 성벽에 고르게 수비대를 배치하기도 힘들었다. 종전 후에 정발은 포장을 받았지만, 다른 장군에 비하면 포상이 늦었다. 그나마 후손이 상소를 하자 뒤늦게 정부에서 조사를 벌였다. 전쟁에서 공을 세우고 승전한 장병을 포상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못지않게 죽음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한 사람도 높여야 한다. 세상은 이런 사람들의 헌신에 큰 빚을 지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임용한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