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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일어섰다” 美 사회 뒤흔드는 여성 파워

입력 | 2020-12-03 03:00:00

[글로벌 현장을 가다]
바이든 승리에 여성표 크게 기여… 상·하원 선거에서도 여성 약진 뚜렷
권력 서열 2·3위 女부통령·하원의장
여성 참정권 획득 100년 만에 대변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새 행정부의 고위직에 잇따라 여성을 지명하고 있고, 대선과 같은 날 치러진 지난달 상·하원 선거에서도 사상 최다 여성 당선인이 탄생하는 등 미 정가에 여풍(女風)이 거세다. 왼쪽부터 첫 여성 부통령이 될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당선인,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 한국계인 영 김 하원의원 당선인, 첫 여성 재무장관에 오를 재닛 옐런 지명자. AP 뉴시스

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조지아의 블루 웨이브(blue wave·미국 민주당을 상징하는 파란색의 물결)가 하루아침에 생겨난 게 아닙니다. 변화를 이뤄내기까지 오랫동안 공을 들였고 특히 우리 여성의 힘이 컸다고 자부합니다.”

미국 남동부 조지아주 애틀랜타시 코브 카운티의 민주당 당협위원장을 맡고 있는 재클린 베타다퍼 씨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 당선인은 지난달 3일 실시된 대선에서 그간 공화당 텃밭으로 여겨졌던 조지아에서 승리하며 결정적 승기를 잡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바이든 당선인은 1976년 대선의 지미 카터 이후 조지아에서 이기고 대선 승자까지 된 첫 민주당 대선 후보다. 카터 대통령은 조지아가 고향인 데다 주지사까지 지낸 토박이다. 하지만 북동부 펜실베이니아 출신으로 지역 연고가 없는 바이든 당선인의 이번 승리는 민주당에 더 큰 의미를 지닌다. 이 같은 조지아의 ‘블루 웨이브’에는 최대 도시 애틀랜타의 경제 호조 등으로 미 각지에서 젊은층이 몰려온 덕도 크지만 정치에 관심이 적었던 여성들의 태도가 변화한 현실과 무관치 않다는 것이 베타다퍼 씨의 분석이다.


○ ‘레드 스테이트’ 변화를 주도하는 여성들
베타다퍼 씨는 10년 전 조지아로 이사 오기 전 서부의 민주당 텃밭인 캘리포니아주에서 살았다. 처음 조지아에 왔을 때만 해도 공화당의 거물 정치인이었던 뉴트 깅그리치 전 하원의장의 영향력이 짙게 남은 전형적인 공화당 우세주, 즉 ‘레드 스테이트(red state)’였다고 했다. 조지아 출신은 아니지만 생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낸 깅그리치 전 의장은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사실상 공화당을 이끌며 클린턴 전 대통령의 라이벌로 꼽혔던 인물이다.

올해 1월 미국 워싱턴 백악관 인근에서 ‘여성행진’ 시위대가 ‘봉기하라!’는 현수막을 들고 가두시위에 나섰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집권한 2017년 이후 매년 1월 미 여성단체가 벌인 시위로 미 여성 정치운동의 상징이 됐다. 워싱턴=AP 뉴시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베타다퍼 씨는 주변의 몇 안 되는 민주당 지지 여성과의 모임을 조직했다. 주변인 다수가 공화당 지지자인 지역사회에서 적지 않은 외로움과 당혹감을 느꼈고 모임 참석자는 수십 명에 불과했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2016년 대선에서 힐러리 클리턴 전 국무장관이 미 역사상 최초의 여성 대선 후보가 되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베타다퍼 씨는 “여성들만의 ‘비밀 그룹’을 결성했다”며 진보 성향이 강한 교외지역 여성을 적극 공략했다고 회상했다. 이들과 자주 회의를 하고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정치에 관심을 가진 여성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특히 고무적이었다고 밝혔다. 여성 스스로가 세상을 바꿔야 하고, 바꿀 수 있다는 점도 알게 됐다고 강조했다.

비록 클린턴 후보는 대선에서 패했지만 2017년 1월 그의 모임은 회원이 400명으로 늘어났다. 베타다퍼 씨는 일찌감치 올해 대선을 내다보고 전화 캠페인, 인터넷 등을 통한 대선 준비 작업에 돌입했다. 특히 2018년 주지사 선거 당시 이들이 지원한 민주당의 흑인 여성 후보 스테이시 에이브럼스(47)가 등장하면서 모임 역시 더 조직화했다.

에이브럼스 후보는 선거에서 패했다. 그러나 그를 눈여겨본 민주당 지도부는 2019년 1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신년 국정연설이 끝난 후 에이브럼스를 민주당 연사로 내세웠다. 그는 인종차별, 반(反)난민 등 트럼프 행정부의 각종 정책을 조목조목 비판하는 연설로 단숨에 전국구 정치인으로 부상했다. 이번 대선에서도 주 곳곳을 누비며 바이든 지지를 호소해 바이든 당선인의 승리에 큰 기여를 했다는 평을 얻고 있다.


○ 행정부·입법부 모두 여성 약진
대선과 같은 날 치러진 상·하원 선거에서 미 역사상 가장 많은 여성 당선인이 탄생한 것도 여성계의 기대감을 높인다. 행정부 수장이 될 바이든 당선인이 새 내각 및 백악관 요직에 줄줄이 여성을 임명하고 있는 와중에 입법부에서도 여풍이 거세게 불고 있는 셈이다.

이번 선거에서 하원 450석 중 117명, 상원 100석 중 24명 등 현재까지 총 141명의 여성 당선인이 등장했다. 141명 중 민주당이 105명, 공화당이 36명으로 민주당 소속이 압도적으로 많다.

상·하원 선거에 출마한 여성 후보 역시 318명으로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2018년 중간선거 때보다 48명 늘었다. 특히 이 중 흑인 여성 후보가 130명에 달하는 등 비백인 여성의 활약이 눈에 띄었다.

한국계 하원의원 당선인 4명 중에서도 영 김(김영옥·58·공화·캘리포니아), 미셸 박 스틸(박은주·65·공화·캘리포니아), 메릴린 순자 스트리클런드(58·민주·워싱턴) 등 3명이 여성이다. 캘리포니아 제39선거구에서 민주당 현역 의원을 물리친 김 당선인은 동아일보의 이메일 질의에 “선거 캠페인에 참여한 직원, 자원봉사자, 인턴의 상당수가 여성이었다. 더 많은 여성을 고용하고 이들의 활동을 늘리도록 힘쓰겠다”고 말했다. 여성 참모진의 헌신적 활약이 선거 승리의 배경이 됐다는 의미다.

대통령에 이은 각각 미 권력서열 2, 3위인 부통령, 하원의장 역시 여성의 차지가 됐다.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당선인은 내년 1월 20일 취임식부터 당연직인 상원의장을 겸한다. 그가 미 역사상 최고위직에 오르는 여성이 되는 것이다. 낸시 펠로시 의장 역시 2018년 1월부터 하원을 이끌어오고 있다. 상·하원 의장을 모두 여성이 맡는 것 역시 처음이다.

올해 8월 해리스 당선인이 최초의 비백인계 여성 부통령 후보로 지명됐을 때 소셜미디어에는 ‘그녀가 일어섰다(She Rose)’라는 해시태그를 단 글이 넘쳐났다. 인도계 모친을 둔 해리스 당선인은 후보 수락 연설 때부터 어머니의 헌신적 지원과 독려로 자신이 현 위치에 올랐으며 후대 여성을 위해 자신 또한 적극 나서겠다는 뜻을 강조했다.

특히 그는 미 최초 여성 하원의원인 지넷 랭킨의 발언으로 유명한 ‘내가 첫 여성 하원의원이지만 마지막은 아닐 것’을 차용해 “내가 첫 비백인계 여성 부통령 후보지만 마지막은 아닐 것”이라고 외쳤다. 많은 여성들 또한 공감과 지지를 호소하며 이 해시태그를 널리 사용했다.

일부 여성 정치인은 벌써부터 목소리를 키우고 있다. 하원 내 의원단체 아시아태평양코커스(CAPAC)는 지난달 말 바이든 당선인에게 “내각에 더 많은 여성과 비백인계를 기용해달라”고 촉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이 단체의 회장인 주디 추(67·공화·캘리포니아), 부회장인 그레이스 멍(45·민주·뉴욕)은 각각 중국계와 대만계다. 당적, 지역구, 연배가 다르지만 같은 아시아계 여성으로서 여성 권익 향상에 힘을 합친 것이다.

즉, 이미 바이든 인수위원회에서 활동하는 고위직 참모 중 53%가 여성이지만 이 정도로 만족할 수 없다는 의사를 드러낸 셈이다. 재닛 옐런 재무장관 지명자, 애브릴 헤인스 국가정보국(DNI) 국장 지명자, 시실리아 라우스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장 지명자 등에 이어 더 많은 여성이 고위직에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


○ 지갑 여는 여성들
여성들의 정치 참여는 후원금 모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공영 NPR방송 보도에 따르면 올해 공화당과 민주당 양당에 들어온 선거자금의 44%를 여성 유권자가 냈다. 2014년(30%)에 비해 14%포인트 늘었다. 그만큼 정치에 대한 여성들의 관심과 참여 의사가 커졌다는 의미다. CNN은 “여성 유권자들이 여성 후보에게 표를 던지면서 정치 지형이 바뀌고 있다”고 진단했다.

슈퍼머조리티(Super Majority), 아시안아메리칸태평양계연합(AAPI) 등 시민단체와 여성단체들은 여성 표심이 이번 대선 결과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민주당은 대선의 핵심 경합주였던 북중부 미시간에서 여성 자원봉사자를 대거 고용해 아직 영어가 유창하지 않은 이민자, 아시아계 유권자를 겨냥해 통·번역 서비스를 지원하며 투표를 독려했다.

미국에서도 여성의 정치 참여는 힘겨운 투쟁의 역사를 통해 이뤄졌다. 20세기 초반만 해도 참정권은 남성에게만 허락된 특권이었다. 미 여성이 참정권을 획득한 1920년에서 꼭 100년 흐른 올해 여성 부통령 당선인을 비롯해 사회 각계에서 여풍이 거세게 불고 있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데비 월시 미국여성정치센터(CAWP) 센터장은 최근 뉴저지주 럿거스대 학보 인터뷰에서 “흑인 여성은 줄곧 민주당의 중추적인 역할을 해왔다”며 이번 대선 승리에도 이들이 큰 영향력을 끼쳤다고 진단했다. 또 백인 남성 일색이던 과거 부통령과 달리 성, 인종이 다른 해리스 당선인이 부통령에 오르면 지금껏 본 적이 없는 방식으로 정책 결정에 힘을 발휘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light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