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인칭 단수/무라카미 하루키 지음·홍은주 옮김/236쪽·1만4500원·문학동네

그 시절과 다름없다. 주인공은 착오로 잘못된 약속을 하고, 그렇게 마주친 어색한 환경에서 실마리 없는 인연과 만난다. 전화번호를 적은 쪽지를 잃어버리며 연락이 끊어지는 설정도 낯설지 않다. 찾아 헤매던 것의 자취는 다시 찾아간 곳에서 백일몽처럼 지워진다.
유행음악이나 야구기록, 역사적 사건으로 오래된 시절을 환기하는 습관도 그대로다. 동물이 인격체로 등장하기, ‘중심이 여러 개 있는 원(圓)’ 같은 모호한 관념이 등장하는 점이나, 내러티브를 소진시킨 뒤 특정의 관념들을 머릿속에서 굴려내듯, 후기(後記)처럼 소환하는 방식도 여전하다. 한산한 야구장의 외야석 같은 고적한 공간에 자신을 놓고 시점을 먼 곳으로 보낼 때, 오랜 독자는 항구에서 멀어져가는 중국행 화물선을 바라보던 한 세대 전의 작가를 떠올리게 된다.
그의 근작 장편들이 화제를 불러올 때마다 코웃음을 쳐온 사람에게도, 알려진 음악작품을 작가가 언급할 때마다 신랄한 반응을 보여온 이에게도 이 책이 품은 수많은 문장들은 핥아먹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다. 한 세대 전 그의 단편집에서 인생의 문장을 구했던 사람은 새 책을 이 지면에 소개하는 일인칭 단수(I·私)였던가. 이 작가의 단편들이 그렇듯, 기억은 흔히 모호하거나 삭제된다.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