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빙 크로스비 ‘White Christmas’
김학선 대중음악평론가
어떤 이유에서건 캐럴이 들리지 않는 연말은 아쉽고 허전하다. 어릴 때 12월이 되면 거리에선 쉼 없이 캐럴이 흘러나왔다. 조금 과장하자면 그때는 집집마다 캐럴 음반 한 장씩은 있는 것 같았다. 계절이 오면 어김없이 당대 최고 스타의 캐럴 음반이 새롭게 나왔다. 똑순이 김민희의 캐럴은 베스트셀러 자리에 올랐고, 개그맨 심형래는 “달릴까 말까” 하며 아이들을 웃게 했다. 캐럴의 주인공이 가수인지 연기자인지 희극인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인기가 얼마나 더 많은지가 중요했다. 그만큼 수요가 있었고 인기의 크기만큼 많이 팔렸다.
캐럴의 주인공이 가수인지 연기자인지 희극인인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음반의 질도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한철 장사용으로 값싼 유행어를 얹은 가볍디가벼운 캐럴이 주를 이루었다. 그때의 수많은 캐럴 가운데 지금까지 살아남은 캐럴은 별로 없다. 10년 뒤를 생각하며 만든 음반이 아니었고, 음반의 생명은 대부분 그해 크리스마스가 지나면서 끝났다. 내리는 눈처럼 많은, 또 그만큼 빨리 사라지는 캐럴 사이에서 시간의 흐름을 견뎌낸 음악이 있다. 빙 크로스비의 ‘White Christmas’다. 무수하게 쏟아져 나온 캐럴 음반 사이엔 빨간 산타클로스 모자를 쓴 빙 크로스비 음반도 있었다. 그 무수한 음반이 모두 사라져갈 때도 빙 크로스비의 음악만은 살아남았다. 빙 크로스비의 목소리는 기품이 있었고, 목소리를 감싸는 오케스트라 반주는 고풍스러웠다. 음악에서 자연스레 묻어나는 기품과 고풍은 유행 따윈 모른다는 채 고고하게 서서 그대로 고전이 되었다. 한 달짜리 음악들이 차례로 명멸해가는 동안 1942년에 나온 빙 크로스비의 ‘White Christmas’는 100년이라는 시간을 향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