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와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렸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정상회담에서 어떤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으십니까. 두 정상이 악수하는 장면이요? 합의사항에 서명하는 장면이요?
미국인들에게 물어보면 가장 흔히 들을 수 있는 대답은 ‘국기 장면’입니다. 미국인들이야 한국이랑 보는 시각이 다를 테니까요. 당시 두 정상 뒤로 정말로 많은 수의 미국과 북한 국기가 배치돼 있었습니다. 워싱턴 특파원을 하면서 자주 행사를 취재해 봤지만 그렇게 많은 국기가 자리 잡을 걸 본 적이 없습니다. 각기 다른 나라 국기들도 아니고, 같은 두 나라 국기들을 저렇게 반복적으로 많이 늘어놓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2018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북미정상회담에서 양국 국기를 배경으로 악수를 하는 두 정상. 백악관 홈페이지
트럼프 대통령의 공과는 후세가 판단할 것이고, 그 평가가 후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의 확실한 공(?)을 하나 꼽자면 국기를 자기 브랜드화 했다는 것입니다. 전문가들은 조 바이든 시대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국기 회복’이라고 입을 모읍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지자 결집을 위해 마음대로 가져갔던 국기의 본래 의미를 되찾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당장 바이든 대통령 취임식 때 애국심을 표하고 싶은 대다수 미국인들은 마음 놓고 손에 들고 흔들 게 없습니다. 성조기를 흔들자니 ‘트럼프 지지자가 훼방을 놓으려고 저러는 것’이라는 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국기는 ‘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로고가 박힌 야구모자 만큼이나 친(親) 트럼프 진영의 심벌이 됐기 때문입니다.
올해 9월 한 유세에서 트럼프 대통령 뒤쪽으로 국기가 빼곡히 진열돼 있다. 폴리티코
국기는 미국인들에게는 ‘스타즈 앤 스트라이프스’ ‘스타 스팽글드 배너’ ‘올드 글로리’ 등의 애칭으로 불리면서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그렇다고 평탄한 세월을 보낸 것만은 아닙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절 성조기를 불태우는 행위에 대해 당시 공화당 주도 의회와 중립적인 연방대법원이 ‘국기보호법’ 제정을 둘러쌓고 대치한 것은 유명한 사례입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베트남전 때 미국의 참전을 반대하는 단체들은 국기를 거꾸로 꼽는 ‘업사이드다운 아메리칸 플래그’ 운동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이후 정권이나 정부 정책에 항의하는 미국인들은 국기를 거꾸로 꼽는 식으로 자기 의사를 표현합니다.
1972년 공화당전당대회에서 국기를 거꾸로 들고 베트남전 반대 시위를 벌이는 미 상이군인들. 앞에 국기를 거꾸로 든 사람이 영화 ‘7월 4일생’의 실제 주인공이기도 한 론 코빅이다. 퍼스트 어멘드먼트 사전
국기를 통해 지지층을 결집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전략을 흔히 ‘깃발의 정치’라고 부릅니다.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는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해 보수행동정치회의(CPAC) 연단에서 국기를 껴안는 제스처를 취한 것이지요. 지지자들의 반응이 좋자 올해는 키스도 하고 “베이비, 너를 사랑해”라고 고백도 합니다. 한 참석자는 “우리의 아름다운 국기를 트럼프만큼 사랑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라는 트윗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2020년 CPAC 행사에서 국기에 키스하는 트럼프 대통령. 슬레이트닷컴
깃발은 비슷한 의미를 가진 또다른 깃발을 부르기 마련입니다. 트럼프 지지 집회에서 남부연합기나 ‘트럼프를 짓밟지 마라’고 쓰인 개즈던기는 국기만큼이나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입니다. ‘흑인의 목숨도 중요하다(BLM)’ 인종차별 반대 시위 때 트럼프 지지자들은 국기 중간 한 줄만 푸른색으로 칠한 ‘경찰의 목숨도 중요하다’ 깃발을 흔들기도 했습니다.
이에 맞서 민주당 지지자들은 국기를 나치 깃발과 함께 드는 식으로 저항의 표시를 했습니다. 국기가 완전히 트럼프의 전용물이 된 것을 인정하는 것이지요. 일부 반(反) 트럼프주의자들은 하도 들게 없다보니 미국 원주민 깃발까지 들고 나오기도 했습니다. 시각효과가 큰 ‘깃발 싸움’에서 민주당 진영은 철저히 패한 셈입니다.
트럼프 지지 집회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노란색 개즈던기. 영국과의 독립전쟁 때 미국의 크리스토퍼 개즈던 장군이 “나를 밟지 마라”고 말한 데서 유래한 것으로, 원래 빈민층이 기득권에 대항하는 시위를 벌일 때 자주 들던 깃발이다. 폴리티코
바이든 당선자는 화합을 외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분간 화합의 상징으로 성조기를 드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짧은 역사를 커버하기 위해 유달리 국기에 애착을 보여 온 미국이 국기를 멀리 하게 된다면 정말 큰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제쯤 다시 국기 흔들고 싶은 마음이 생길지 궁금합니다.
정미경 기자micke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