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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홍 칼럼]‘尹축출=檢개혁’… 자기들끼리만 걸린 집단최면

입력 | 2020-12-11 03:00:00


이기홍 대기자

‘가을님이 보름달님을 좋아합니다.’

요즘 구(舊) 서울시청사 현관에 걸려 있는 대형 그림이 눈길을 끈다. 서울시에 물어보니 9월16일 발표한 ‘서울꿈새김판 문안공모전’ 당선작으로 이달 중순까지 게시된다고 한다. 정치적 의도는 없는 그림이지만 워낙 추미애 장관 경질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다 보니 가을님·달님에서 추(秋)미애, 문(moon)재인을 연상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추 장관은 친문을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열렬한 구애’라고 표현해도 될 만큼 충성을 바쳤다. 하지만 요즘 여권에선 추 장관의 추태가 문 정권 지지율 추락의 일등공신이라는 원망이 나온다.

인민위원회를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검찰총장을 쫓아내려 하고, 공수처법의 유일한 정치적 독립 장치마저 서슴없이 파기하는 이 모든 폭주와 혼돈이 다 추미애 탓일까.

현 사태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난해 9월 27일로 거슬러 가야 한다.

“검찰 개혁 요구가 높아지고 있는 현실을 성찰해야 한다.” 미국 방문에서 돌아온 문대통령이 조국 사태에 대해 내놓은 첫 언급이다. 8월 초 조국을 법무장관 후보에 내정한 이후 거의 두 달 동안 나라를 뒤흔들 만큼 쏟아진 비리 의혹과 위선의 실태에 대해선 일절 언급 없이 검찰의 수사 착수만을 정면 비판한 것이다.

그때까지 조국 사태는 공정, 위선 등의 문제였을 뿐 검찰개혁과 연관시키는 그 어떤 공론도 없었으나 대통령의 발언을 신호탄으로 여당과 친여매체 관변단체들이 총동원돼 프레임 전환에 나섰다. ‘검찰개혁=윤석열 축출’이라는 기발한 프레임은 문 대통령이 직접 선보인 작품인 것이다. 추미애는 성정이 유별난 행동대장에 불과했다.

친문이 윤석열과 검찰개혁을 연결시킨 유일한 논리는 조국에 대한 검찰 수사가 과잉, 먼지털이식 수사이므로 검찰권 남용이며 검찰의 불순한 의도가 분명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언론들이 제기한 조국 일가 관련 의혹들은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산더미 같았다. 만약 검찰이 한두 개만 추려 부분 수사에 착수했다면 봐주기 수사, 덮어버리기 작전이라는 비난이 쏟아졌을 것이다.

문 대통령이 프레임 전환을 안했다면 검찰개혁은 검경수사권 조정과 수사 관행·제도 개선 논의를 거쳐 별 소란없이 진행됐을 것이다. 이미 검경수사권 조정안이 그해 4월에 국회 패스트트랙에 올려진 상태였다. 여기에 검찰총장이 어떻게 저항할 수 있었겠는가.

며칠 전 TV에서 ‘개는 훌륭하다’라는 프로그램 재방송을 봤다. 대형견이 산책길에 주인이 목줄을 당기자 주인까지 물려고 할 정도로 공격성을 보였다. 강형욱 훈련사도 진땀을 흘렸다.

문 대통령은 검찰이 자신의 아바타격인 조국에게 칼날을 겨누자 주인에게 대드는 맹견의 모습을 봤을 것이다. 적폐수사 때는 가차 없이 물어뜯는 검찰이 이뻐 어쩔 줄 몰랐는데 막상 그 송곳니와 발톱이 자신을 향할 수 있다고 생각하자 아찔했을 것이다.

문 정권의 큰 착각은 정권이 맹견의 주인이라 여기는 점이다. 맹견의 주인은 국민과 헌법이다. 어떤 정권이든 청와대를 비롯한 정치권력은 맹견이 가장 예리하게 감시해야 할 ‘잠재적 대도(大盜)’로 여겨져야 한다.

물론 맹견에겐 통제가 필요하다. 그 통제는 두 기둥으로 이뤄진다.

하나는 정권이라는 투견꾼이 맹견을 사냥개·애완견으로 악용하지 못하도록 정치적 독립,중립성을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다.

또 하나는 맹견이 작은 개나 행인에게 으르렁대지 않게 하는 예절 훈련과 인내심·복종심, 즉 수사관행 및 검찰 구성원들의 의식 개선, 그리고 목줄과 입마개, 즉 수사심의위원회·대배심 같은 제도적 장치의 마련이다.

더 강한 목줄이 필요해 공수처를 만들 경우 대전제는 그 목줄이 절대 투견꾼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해선 안 된다는 점이다.

여당이 입법 폭주에 나서기 하루 전인 7일 문 대통령의 발언은 매우 강도가 높았고 확신에 차 있었다. 그런데 그 내용은 하려고 하는 방향의 정반대였다. “권력기관을 정치로부터 완전히 독립시키고, 그 어떤 기관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할 수 없도록 견제장치를 만들겠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2개월 전 4·13호헌조치 발표 당시 전두환의 확신에 찬 표정이 잊혀지지 않는다. 순전히 집권 영속화를 위한 방편으로 간선제를 고집해 온 장본인이면서도 간선제가 북의 남침과 좌경 세력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보루라고 확신하는 모습이었다. 권력욕과 정보 편식에 따른 확증편향이 상승작용을 일으켜 최면상태가 된 듯했다.

이 정권도 지난 1년간 ‘윤석열=개혁 저항세력’이라고 국민들에게 최면을 걸려 했으나 결과는 친문 자기들끼리만 집단최면에 걸리게 됐다.

지지율이 급락하면 중도를 바라보며 통합과 협치로 향하는 게 상식이고 정상인데, 정반대로 더 굴을 깊게 파고 지지세력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믿을 건 핵심 지지층 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지층 환심을 사는데 사활을 걸다 보니 노동법 개정안에서도 그나마 최소한의 겉치레 균형이라도 맞추려고 곁들였던 조항들마저 다 없애 버렸다. 유럽 등 선진국에서 노동개혁은 진보정권이 이뤄냈다는 충고들은 모두 공염불이 되고 말았다. 진보란 이름이 부끄러운, 그저 권력 유지에 득이 되는 것만 하는 차베스급의 하류 좌파정권 행태다.

이런 식으로 진보의 가치를 훼손하면 훗날 역사가들은 민주화 이후 진보정권의 족보에서 문재인 정권은 제외시킬 가능성이 크다. 자칫하면 권위주의 독재 2기로 분류될 수 있음을 진정 모르는가.

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