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섭 패션디자이너·홍익대 미술대 교수
하지만 20대의 청춘을 질풍노도(疾風怒濤)의 시기라 하는 것처럼 20세를 맞이한 21세기는 질풍노도라는 말 그대로 ‘빠르게 휘몰아치는 바람과 험난하게 닥쳐오는 파도’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연일까요? 질풍노도의 ‘질(疾)’은 ‘빠르다, 앓다, 고생하다’라는 의미의 동사로도 쓰이지만 병, 전염병 같은 명사의 의미를 더불어 갖고 있죠. 코로나라는 질병이 그야말로 2020년의 패션산업을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우선 재택근무의 확대로 일터와 쉼터의 경계가 없어진 시대에 편안함을 추구하는 안정감이 그 무엇보다 중요해졌습니다. 내가 불편하더라도 타인과 조직을 위해 감수했던 정장과 구두는 몇 달 동안 구경 못한 지 오래입니다. 그러는 사이 잠옷인 줄만 알았던 옷들은 고급화된 소재와 트렌디한 색상의 라운지 웨어와 원마일 웨어로 탈바꿈했습니다. 운동화로만 여겼던 신발들은 최첨단 소재와 인체공학적이고 감각적인 디자인으로 무장해 어느 자리에서도 꿀리지 않는 패션 슈즈로 등극했습니다.
또 하나의 조용한 변화는 바로 환경에 대한 경각심입니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일어나자 이제는 더 이상 남의 얘기가 아닌 게 되었습니다. 이상 기온, 긴 장마, 폭염 등은 흡사 지구가 몸살을 겪는 게 아닌가 싶고 메르스, 코로나와 같은 바이러스의 등장은 흡사 지구가 감기에 걸린 게 아닌가 싶습니다. 내가 의류수거함에 함부로 처분한 많은 옷이 마음에 걸리고, 옷을 구입할 때도 이제는 친환경 소재에 눈길이 갑니다. 이에 기업들은 지속가능한 소비를 위해 과대 포장을 줄이고 재활용 소재를 활용하는 등 친환경 정책을 수립하고 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변화가 당황스럽고 힘들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마 2030년에는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면 지금 같은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지 않을까요. 내년 패션이 더 성숙해질 거라 희망해 봅니다.
간호섭 패션디자이너·홍익대 미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