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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심하면 기억력도 감퇴… 환자에게 지속 관심 필요”

입력 | 2020-12-12 03:00:00

[떠오르는 베스트 닥터]<19> 전홍진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뇌 영상 찍어 자살충동 원인 밝혀
美서 개발된 치료약 임상시험 참여
VR 통한 우울증 치료법도 개발




전홍진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우울증과 자살 충동의 상관관계를 비롯해 우울증 연구를 다양하게 하는 의사로 유명하다. 전 교수가 올 7월 출간해 베스트셀러에 오른 자신의 저서를 펼친 채 활짝 웃고 있다. 삼성서울병원 제공

《2016년 50대 여성 A 씨가 전홍진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48)를 찾았다. A 씨는 늘 불안에 떨었고, 밤에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희망이 없다며 죽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하더니 결국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다. 다행히 남편이 미리 발견해 병원에 데리고 왔다. 중증 우울증이었다. 전 교수는 A 씨를 입원시킨 후 약물 치료와 전기로 뇌를 자극하는 치료를 병행했다. 한 달 만에 불안감이 먼저 줄었고, 죽고 싶다는 생각이 서서히 사라졌다. A 씨는 2년 동안 치료를 받았다. 현재 우울증은 사라졌고 새 직장에 잘 다니고 있다. A 씨는 그때 자신이 왜 죽으려고 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전 교수는 “우울증으로 불안감이 생기고, 그게 증폭돼 자살 충동이 생기지만 당사자는 의식하지 못한다. 이래서 우울증이 무서운 것”이라고 말했다.》


○ 자살 충동 구체적 이유, 뇌과학으로 규명
우울증 환자의 자살 충동이 높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뇌과학에 따르면 뇌의 신경 네트워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뇌의 어느 부위에 문제가 생긴 것일까. 2011년 전 교수가 이 연구를 시작했다.

전 교수는 100여 명을 △자살 충동이 있는 우울증 환자 △자살 충동이 없는 우울증 환자 △우울증이 없는 대조군 등 세 그룹으로 나눴다. 뇌 영상을 촬영하며 2년 동안 추적 관찰했다. 그 결과 자살 충동이 있는 우울증 환자들은 뇌 중간층 변연계와 맨 바깥층의 전두엽 사이 신경이 덜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둘 사이의 네트워크가 느슨한 탓에 충동이 관리되지 않아 자살 충동이 생긴 것이다.

이어 이 연구를 실제 치료에 활용할 방안을 찾기 시작했다. 그 첫 시도가 2014∼2016년에 진행한 ‘뇌유래 신경영양인자(BDNF)’ 연구다. BDNF는 단백질의 일종으로 뇌신경의 성장과 회복을 돕는 물질이다. 300여 명의 우울증 환자를 상대로 뇌 안에 BDNF가 얼마나 들어 있는지를 조사했다. 그 결과 어린 시절 학대를 받았거나 트라우마가 있는 우울증 환자일수록 BDNF가 적었다. 전 교수는 “끊어진 뇌신경을 이을 수는 없지만 이 BDNF를 늘리면 치료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최근 미국에서 BDNF를 늘린 스프레이 형태의 약물이 개발됐다. 이 약의 임상시험에 전 교수도 참여했다. 전 교수는 국내에서도 곧 이 약을 처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전 교수는 2018년에는 4차원(4D) 가상현실(VR)로 우울증을 치료하는 방법도 개발했다. 가상현실을 통해 긴장 이완 훈련을 함으로써 행동을 변화시키는 방식이다. 현재 임상시험이 진행 중이며 2, 3년 후 치료에 적용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 “한국, 자살충동 높은 ‘멜랑콜리아형’ 많아”
전 교수는 우울증 분야에서 다양한 연구를 한 의사로 유명하다. 지금까지 국제 학술지에 150여 편의 논문을 게재했다. 2013년에는 한국, 중국, 대만, 싱가포르, 태국, 말레이시아 6개국의 우울증 환자 유형을 분석했다. 그 결과 한국은 즐거운 감정을 느끼지 못하거나 불안해하며, 식욕 감퇴와 체중 감소가 동반하는 유형인 ‘멜랑콜리아형’ 우울증이 특히 많았다. 한국 우울증 환자의 42.6%가 이 유형이었으며, 이는 아시아의 다른 나라보다 1.4배 높은 수치였다. 멜랑콜리아형 우울증일수록 자살 충동도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울증이 심해지면 기억력도 떨어진다. 전 교수는 2015년 120명을 대상으로 우울증 환자의 인지 기능을 조사했다. 그 결과 우울증과 불안증이 심하면 집중력과 단기 기억력, 지속적 주의력이 모두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대로 우울증을 치료하면 인지 기능이 회복됐다. 요즘엔 국내 바이오 기업과 함께 우울증과 과민장증후군에 대한 연구를 진행 중이다. 장 기능이 떨어진 우울증 환자 100명을 절반씩 나눠 각각 유산균의 일종인 프로바이오틱스와 위약(가짜약)을 복용케 했다. 그 결과 프로바이오틱스를 복용한 그룹에서 장의 기능이 좋아졌고, 우울감과 불안감도 줄었다.


○ 우울증 이해에 도움 되는 책 펴내
2015년 대입 재수생 B 양이 전 교수를 찾았다. B 양은 고등학교 성적이 거의 최하위였고, 이 때문에 심한 우울증을 겪고 있었다. B 양은 울면서 도와달라고 했다. 진료 과정에서 전 교수가 흥미로운 사실을 찾아냈다. B 양이 시험을 치를 때 1∼5번 문제를 푸는 데 시간을 모두 허비한다는 것. 왜 그런지를 물었다. 혹시 문제를 잘못 이해하지 않았는지 걱정돼서 반복하기 때문이란다. 강박증이 우울증과 겹친 사례였다. 전 교수는 약물 치료와 행동 치료를 병행했다. 완벽하게 못 풀더라도 다음 문제로 넘어가도록 했다. 차츰 푸는 문제의 수가 늘어났고, 나중에는 정해진 시간 내에 모든 문제를 풀 수 있게 됐다. 일상생활을 할 때도 약속 시간에 늦지 않도록 시간을 늘 체크하도록 했다. 6개월이 지난 후 B 양은 상위권 대학에 합격했다. 물론 우울증은 말끔히 사라졌다. 전 교수는 “수험생, 공무원시험 준비생 중에 B 양과 비슷한 사례가 꽤 많다”고 말했다.

이 외에도 우리 주변에 우울증 환자가 의외로 많다는 게 전 교수의 설명이다. 전 교수는 이들에게 추궁보다는 관심을 가져 줄 것을 권했다. 올 7월에 우울증 환자 치료 경험을 모아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책’(글항아리)을 출간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이 책은 6개월 만에 7만 부가 팔려나가며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렸다. 전 교수는 “우울증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어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 ‘코로나 블루’ 이겨내려면… ▼
평소 생활리듬 유지

타인과 갈등 피하고 햇볕 자주, 많이 쬐어야

전홍진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우울증 환자도 늘었다”고 말했다. 이른바 ‘코로나 블루’다.

우울증을 예방하고 극복하기 위해서는 △유산소 운동을 충분히 하고 △다른 사람과 원만히 소통하며 △즐거운 마음을 유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전 교수는 여기에 세 가지를 더 추가하면 코로나 블루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했다.

첫째, 생활 리듬을 유지한다. 코로나 블루는 재택근무나 재택교육 등의 이유로 일상생활에 차질이 생기면서 나타난다. 아이들은 게임하면서, 어른들은 영화나 TV를 보면서 수면 시간이 바뀌고 길어진다. 그 결과 생체 리듬이 깨지고, 뇌에도 악영향이 간다. 전 교수는 “생활 리듬이 자주 바뀌는 사람은 특히 우울증에 취약하다. 따라서 가급적 밤낮을 바꾸지 않고 평소의 생활 리듬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둘째, 트라우마가 될 만한 일을 만들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전 교수는 “트라우마로 남을 수 있는 외부 자극에 노출될수록 우울증이 생기기 쉽다. 다른 사람들과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게 무척 중요하다”고 말했다.

자가격리 혹은 사회적 거리 두기 강화로 홀로 있을 때 과거의 트라우마를 떠올리는 것도 금물이다. 기분이 가라앉아 있을 때 종종 과거의 아픈 기억들을 회상하는 사람들이 있다. 몸은 집에 있는데 정신은 과거로 돌아간 셈인데,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우울증이 생길 수 있다. 따라서 혼자 있더라도 상처, 사고, 헤어짐 같은 아픈 기억을 의도적으로라도 떠올리지 말아야 한다. 게다가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현실이 정말로 위험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셋째, 햇볕을 자주, 많이 쬐어야 한다. 전 교수는 “눈을 통해 유입된 빛이 뇌를 자극하는 효과가 크다. 집에 혼자 있더라도 늘 햇볕을 가까이 해야 한다”고 말했다. 집 안 분위기를 포근하게 한다며 다소 어둡게 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이렇게 하면 뇌가 빛을 덜 인식한다. 따라서 아침이 되면 가장 먼저 커튼부터 젖히도록 하자. 상황이 허락한다면 가벼운 산책도 좋다.

 

김상훈 기자 core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