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건 부장관이 방한 중인 11일 외교부 장관 공관에서 열린 만찬 참석 전 방명록을 적고 있다. 외교부 제공
한기재 정치부 기자
지난주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 자격으로 마지막 방한을 마무리 짓고 미국으로 돌아간 비건 부장관에 대해 외교부 당국자들은 이런 아쉬움을 드러냈다. 실제로 그가 대북정책특별대표를 맡아 북한과 북핵 협상에 나선 지난 2년여간 정부가 기대했던 미국의 ‘화끈한’ 선제적 대북 양보가 이뤄진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비건 부장관은 “한국은 주권국가”라며 정부 입장을 최대한 이해하는 태도로 한미 간 협의에 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덕분에 협의를 위해 그를 만나러 가는 정부 당국자들은 ‘비건이 일단은 우리 얘기를 들어줄 것이니 면전에서 얼굴 붉힐 일은 없을 것’이라는 안도감으로 미국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외교당국 입장에서는 미 국무부 2인자에까지 오른 그의 존재 자체를 외교 자산으로 여길 만했다.
그의 지난주 3박 4일 일정 동안 외교안보 고위급 당국자들이 총출동한 데는 이런 속내가 있었을 것이다. 비건 부장관은 한국에 머문 3일 동안 매일 핵심 당국자들과 만찬을 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단체로 만찬을 즐기는 자체가 논란이 될 수 있음에도 외교부가 그의 단골인 서울 종로구 닭한마리집을 통째로 빌린 것은 아슬아슬할 정도의 파격이었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호의와 아쉬움을 뒤로하고 원칙적 대북 외교 정책을 견지할 ‘바이든 시대’에 누가 북핵 협상을 맡을지 촉각을 곤두세워야 할 때다. 비건 부장관처럼 ‘무슨 얘기든 일단 들어보자’는 호의를 보일 인물이 나타날 가능성은 적은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바이든 행정부는 한미동맹을 중시하지만 북핵 문제와 북한 인권 등 대북 정책 접근에서는 철두철미할 정도로 원칙적이다.
비건 부장관의 퇴장은 ‘전략의 대전환’을 꾀할 기회인지 모른다. 그의 ‘한국 존중’에 기대 우리 정부가 현실화 가능성이 높지 않은 ‘쑥스러운’ 제안을 슬쩍 건넸다가 결과를 얻지 못했던 패턴을 깰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참에 한미가 빈틈없는 공감대를 갖고 북한 비핵화를 위한 냉정하고 합리적인 전략들을 논의한다면 생산적인 ‘포스트 비건’ 시대 대비책이 되지 않을까.
한기재 정치부 기자 recor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