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5월 30일
플래시백
기와집은 꿈도 꿀 수 없었고 명주옷도 입을 수 없었습니다. 갓은 물론 가죽신도 허용되지 않았죠. 봉두난발에 대나무 패랭이 차림으로 다녀야 했으니 눈에 띄게 표가 났습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선 담배를 피우지도, 술을 마시지도 못했고 무조건 존댓말을 써야 했죠. 죽어서도 상여를 쓸 수 없었고 자녀를 교육시킬 수도 없었습니다. 결혼과 사회생활에도 금기가 많았습니다. 매질 같은 부당한 체형을 당해도 법은 멀리 있을 뿐이었죠.이들은 바로 백정(白丁)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최하층 천민으로 지독한 차별을 받았죠.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도가 철폐됐습니다. 하지만 법적인 신분해방과 달리 뿌리 깊은 사회문화적 차별은 당장 고쳐질 리 없었죠. 일제는 호적에 ‘도한(屠漢)’이라고 써넣기까지 했습니다. 일제가 도살장을 관장하고 사용료를 거두면서 수탈은 더 강화됐죠. 한때 소가죽의 70%를 조선에서 수입했으니 수급에 차질이 없도록 단단히 틀어쥐었습니다.
40만 백정의 한을 대변하는 형평사는 ‘과거를 회상하면 온종일 통곡해도 피눈물을 멈출 수 없다’며 ‘계급을 타파하고 모욕적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권장해 우리도 참다운 인간이 되고 싶다’고 외쳤습니다. 계급타파를 앞세웠지만 기존 질서를 뒤엎는 것이 아니라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호소할 뿐이었죠. 장지필은 동아일보에 “우리의 운동은 애걸적이요, 반항적은 아닙니다”라고 밝혔습니다. 창립 1년 만에 지사 12곳, 분사 67곳을 거느리는 조직으로 성장했죠. 3·1운동 영향으로 각지 청년회나 노동공제회가 적극 후원한 덕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백정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밑바닥 차별의식은 여전했습니다. 농청(農廳)을 중심으로 농민들 반발이 거셌죠. 기생들조차 형평사 축하식에 불려가기를 거부했습니다. 이 해 5월 말에 진주 24개 농청 대표들이 ‘소고기 불매운동’을 결의하고 음식점마다 감시단을 보내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형평사에 동조한 상점에 수백 명이 몰려가 시위를 벌여 전쟁이나 다름없었죠. 몰매가 오가기도 했고요. 1925년 9월까지 모두 40건 넘는 충돌이 일어났죠. 일제 경찰은 일본 백정인 에타(穢多)도 평민처럼 대우하지 않는다며 잘못은 백정한테 있다고 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형평사 내부 분열까지 일어났습니다. 창립 1년 만인 1924년 장지필을 중심으로 백정만의 형평사혁신동맹을 만들었던 것이죠. 신분해방운동에 더 집중하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이에 ‘원조’ 형평사는 5월 29일자 동아일보에 장지필의 잘못을 조목조목 지적하는 공개서한을 실으며 맞섰습니다. 이후에도 분열과 갈등은 일제의 탄압과 사회주의사상 유입 등 변수가 겹치면서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차별철폐단체 수평사와 교류를 이어간 점도 일제가 탄압의 고삐를 당긴 요인이었죠.
동아일보는 5월 29일자 사설에서 ‘형평사운동은 조선인 모두의 해방운동에 큰 경종’이라며 ‘장래성과 창조성이 있는 해방운동은 소작인운동과 형평운동’이라고 지지했죠. 진주 농민들의 시위에는 5월 31일자 사설을 통해 ‘반대운동이 인격의 평등 관념을 무시하고 형평사원을 인간이 아니라고 간주했다면 시대의 진운을 무시하고 인격의 존중을 모독하는 어리석은 주장’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이후에도 형평사 소식을 꾸준히 전하며 평등의식 전파에 힘썼습니다.
이진 기자 leej@donga.com
원문
衡平社(형평사)를 反對(반대)하야牛肉(우육)의 非買同盟(비매동맹)
진주 이십사 동리의 각 농쳥들이
단결하고 형평운동을 반대한다
實行方法(실행방법)도 極(극)히 嚴重(엄중)
진주(晋州) 형평사(衡平社) 계급타파운동『階級打破運動』이 생긴 뒤로 일반의 반대가 심하다 함은 본보에 임의 보도한 바어니와 갈사록 반대가 더욱 심하야저서 이전 동리별로 이십사 동리 농텽 대표자들이 중안동동사(中安洞洞舍)에 모혀 좌긔와 가튼 결의를 하고 각々 실행하리라는대
一(일)、토산을 장려할 일
一(일)、술을 먹지 말 일
一(일)、담배를 피우지 말 일
一(일)、소고기를 사먹지 말 일
决議事項(결의사항)
형평사에 관계한 자는
백뎡 대우를 한다
오월 이십륙일 오후 두 시경에 각 농텽 대표자 칠십여인이 의곡사(義谷寺)에 모히여 다음과 갓흔 결의를 하얏더라.
一(일)、衡平社(형평사)에 關係(관계)가 有(유)한 者(자)에 限(한)하야는 白丁(백정)과 同一(동일)히 待遇(대우)할 일
一(일)、牛肉(우육)은 絶對(절대)로 非賣同盟(비매동맹)할 일
一(일)、晋州靑年會(진주청년회)에 對(대)하야 衡平社(형평사)와 絶對(절대)로 關係(관계)가 無(무)토록 할 일
一(일)、勞働團體(노동단체)에서는 衡平社(형평사)를 絶對(절대)로 關係(관계)치 말게 할 일
一(일)、衡平社(형평사)를 排斥(배척)할 일
인대 진주경찰서(晋州警察署) 편산서댱(片山署長)은 그중 대표자 될만한 한 사람을 동서로 불너다가 이르기를 우리 일본에서 예다(穢多)란 것은 평민과 가치 대우를 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저의들도 아무 성공한 일이 업슨즉 이번 형평사도 그와 갓흘 것이니 농텽에서 간섭치 말면 형평사 백뎡들이 잘못하는 일이 잇스면 내가 곳 해산을 할 터이라 함으로 이 말을 들은 농텽에서는 크게 깁버하고 물너왓다는대 목하 진주에서는 물론이 분운하다더라.
衡平社長(형평사장)을 毆打(구타)
슐집 싸움에 불똥이 뛰여
수십 명에게 늘신히 마저
또 본월 이십오일 오후 아홉 시경 비봉동 형평사에서는 큰 싸홈이 이러낫는대 그 내용을 듯건대 당디 중안동에 사는 탁윤환(卓潤煥)이란 사람이 술을 잔뜩 먹고 형평사 윗집 신경선(申敬善)이란 늘고 병들어 방금 위독한 가온대 잇는 안로인의 방에 와서 술을 달나 하기로 그 로인은 술이 업다 한즉 탁윤환은 당장에 이 년아 저 년아 하면서 백뎡놈들의게는 밥을 팔고 나의게는 술이 엇지 업다느냐 하며 욕설을 하엿는대 이 말을 들은 형평사에서는 심히 분개하야 당장에 탁윤환의 멱살을 들어 마당에다 업허놋코 이십여인의 발길과 주먹으로 무수히 따리면서 이놈 너는 엇더한 놈이냐 이놈아 너는 그전에 일본사람의 종노릇하든 놈이 아니냐 너가치 더러운 놈은 따려 죽이고 내가 대신 죽겟다고 하야 손발길이 오고 가는 제음에 의복이 다 찌여지고 그대로 할 수 업시 몸을 피하야 도망하얏다는 바 일시는 대소동이 되여 모혀든 사람이 백여인에 달하얏다.
얼마 지난 뒤에 탁윤환은 참다 못하야 자긔의 친한 사람의 응원을 비러 가지고 다시 형평사에 차자와서 그 사댱 되는 강상호(姜相鎬) 씨를 불너 내여 두 빰을 무수히 란타하엿스며 또 의복을 짓는 등 봉욕을 주는 동시에 이 급보를 들은 진주경찰서에서는 십여인의 경관이 현댱에 달녀가서 겨우 진압을 하얏더라.(진주)
현대문
형평사에 반대하여소고기 불매동맹
진주 24개 동네 두레가
단결해 형평운동에 반대한다
실행방법도 매우 엄중
진주 형평사 계급타파운동이 생긴 뒤로 일반의 반대가 심하다고 하는 점은 본보가 이미 보도했다. 갈수록 반대가 심해져서 이전 동리별로 24개 동네 두레 대표자들이 중안동 사무실에 모여 아래와 같이 결의하고 각각 실행하겠다고 했다.
1. 토산을 장려할 일.
1. 술을 먹지 말 일.
1. 담배를 피우지 말 일.
1. 소고기를 사먹지 말 일.
이상으로 이날 밤 9시 경에는 ‘형평사 공격’ 또는 ‘새 백정 강상호 신현수 천석구’라고 쓴 깃발을 들고 대안동 평안동 부근으로 돌아다니며 신현수 천석구 씨가 경영하는 상점에 수백 명의 군중이 몰려가서 고함을 지르며 풍물을 치는 등 여러 가지 위험한 시위를 했다. 25일이 돼서는 한 동네에서 참가할 사람 2명씩을 선정하되 같은 동네사람한테만 맡겨서는 서로 친한 탓에 혹시 사정을 봐줄 수 있으므로 다른 동네사람 한 명씩 짝을 지어서 각 음식점을 일일이 조사해 소고기를 사먹지 못하게 하기로 했다. 아직 사정을 자세히 알지 못하고 사다 놓은 집을 발견하였으므로 그들을 대상으로 상당한 처벌을 하기로 하였을 뿐 아니라 이로 인해 각 두레에서는 밤낮으로 회의를 계속하는 중이다. 일반의 여론은 나날이 높아가고 인심이 격분되어 거의 전쟁상태가 되었다고 한다.
결의사항
형평사에 관계한 자는
백정 대우를 한다
5월 26일 오후 2시경에 각 두레 대표자 70여명이 의곡사에 모여 다음과 같이 결의했다.
1. 형평사에 관계가 잇는 자에 한하여 백정과 동일하게 대우할 일.
1. 소고기는 절대로 불매동맹할 일.
1. 진주청년회에 대하여 형평사와 절대로 관계가 없도록 할 일.
1. 노동단체에서는 절대로 형평사와 관계하지 말도록 할 일.
1. 형평사를 배척할 일.
진주경찰서 가타야마 서장은 그중 대표자 됨직한 한 사람을 경찰서로 불러 말하기를 우리 일본에서 에타(穢多)라는 것은 평민과 같이 대우를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저희들도 아무 성공한 일이 없으므로 이번 형평사도 그와 같을 것이다. 두레에서 간섭하지 않고 형평사 백정들이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내가 즉각 해산을 시킬 것이라고 하자 이 말을 들은 두레에서는 크게 기뻐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현재 진주에서는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떠들썩하다고 한다.
형평사장을 구타
술집 싸움에 불똥이 튀어
수십 명에게 늘씬하게 맞아
또 이달 25일 오후 9시경 비봉동 형평사에서는 큰 싸움이 일어났다. 취재 결과 그 지역 중안동에 사는 탁윤환이라는 사람이 술에 크게 취해 형평사 윗집 신경선이란 늙고 병들어 지금이라도 위독한 가운데 있는 노파의 방에 와서 술을 달라고 하였다. 그 노파가 술이 없다고 하자 탁윤환은 당장 ‘이 년아, 저 년아’ 하면서 ‘백정놈들에게는 밥을 팔고 나한테는 술이 왜 없다고 하느냐’며 욕설을 하였다. 이 말을 들은 형평사에서는 크게 분개해 당장에 탁윤환의 멱살을 잡아 마당에 엎어놓고 20여 명이 발길과 주먹으로 무수하게 때리면서 ‘이 놈, 너는 어떤 놈이냐. 너는 그전에 일본사람 종노릇하던 놈이 아니냐. 너같이 더러운 놈은 때려죽이고 내가 대신 죽겠다’고 하면서 손발길이 오고가는 즈음에 옷이 다 찢어지고 할 수 없이 그대로 몸을 피해 도망갔다고 한다. 한때 큰 소동이 되어 모여든 사람이 100여 명에 이르렀다.
얼마 지난 뒤에 탁윤환은 분을 참지 못해 친한 사람의 응원을 빌려 가지고 다시 형평사에 찾아와서 사장 되는 강상호 씨를 불러내어 두 뺨을 무수하게 난타했으며 또 옷을 찢는 등 모욕을 주었다. 이 급한 소식을 들은 진주경찰서에서는 10여 명의 경찰이 현장에 달려가서 겨우 진압을 하였다고 한다.(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