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인권단체인 ‘엔케이워치’ 안명철 대표. 안명철 대표 제공.
하사 계급장을 단 그는 탄창 하나에 30발이 들어가는 AK47 자동소총을 메고, 탄창 3개를 허리에 둘렀다. 어깨에 멘 배낭 안에는 장전한 군용 권총 6정과 탄창이 들어 있었다.
그는 강에 도착하자마자 그대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실수였다. 평소 허리 정도밖에 오지 않던 강물이라 눈여겨 두었던 곳인데, 장마가 갓 끝난 때라 물이 불어 있었다. 물살에 갑자기 몸이 휘감겨 말려 들어갔다. 의식이 아득해지는 순간 소총을 버리고 탄창도 풀어 던졌다. 허우적거리다 배낭만 쥐고 물살을 헤치고 겨우 뭍에 도착했다. 아차 싶었다. 중국이 아니라 북한 땅이었다.
“나는 왜 고향과 가족, 미래를 버리고 이렇게 도망자 신세가 됐나요.”
40분쯤 지났을 때 멀리 추격해오는 트럭들의 불빛이 보였다.
방금 죽을 뻔 하다가 겨우 빠져나온 강물에 또 들어가긴 싫었다.
“여기서 싸우다 죽자”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중무장한 군인들과 권총 몇 자루를 들고 저항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였다.
수백 개의 전짓불과 소란스럽게 짖어대는 군견들이 건너편 두만강 기슭을 훑어대며 수색하고 있었다. 1994년 9월 18일 함북 회령에 위치한 22호 관리소(정치범수용소) 경비대 하사 안명철 씨(당시 25세)에게 일어난 일이다.
# 수용소에서의 탈출
추격의 불빛을 뒤로 하고 산을 오르며 안 씨는 몇 시간 사이 일어난 일을 되짚어봤다.9월 17일 토요일 늦은 저녁. 함께 근무하던 근무조 장교들이 주말이라며 신이나 퇴근하자 안 씨는 몰래 내무반을 빠져 나왔다. 며칠동안 세운 탈북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였다.
경비대 소속 트럭 운전수였던 그는 우선 자기가 몰던 차만 남기고 나머지 차량의 휘발유관을 모두 잘랐다. 차량 추격을 막기 위해서였다.
무기고에 들어가 총과 권총을 모두 꺼내 차에 실었다. 차에 시동을 거니 새벽 2시경이 됐다.
탈북 할 때 꼭 데리고 가고 싶은 수감자 오누이가 있었다. 최순애라는 이름의 누나는 4살 때, 최희유란 이름의 동생은 2살 때 수용소에 끌려와 자랐다. 강원도 안변에서 태어난 이들은 인민군 소장을 하던 큰아버지가 반동으로 처벌받으면서 온 가족이 22호 수용소로 끌려왔다. 이들은 22년간 수용소에서만 자랐다. 남동생은 안 씨보다 한 살 어렸고, 누나는 한 살 많았다.
수용소 수리반에서 일한 남동생은 평소 안 씨의 자동차 수리를 많이 도와주었다.
안 씨는 탈북을 결심하면서 평소 정이 들었던 이들에게 자유를 찾아주고 싶었다. 그래서 어느 날 저녁에 “돼지고기를 갖다 줄 테니 차 소리가 들리면 둘 다 숙소 앞 도로에 몰래 나오라”고 일러두었다. 이들은 약속을 지켰다.
오누이를 운전석에 태운 차는 초소를 향해 내달렸다. 초소의 탐조등 불빛이 멀리 보일 때 안 씨는 차를 세웠다. 그리고 권총을 꺼내 하나씩 오누이에게 주며 그때에야 비로소 계획을 말했다.
“나는 이제 남조선으로 간다. 너희들은 어차피 여기서 죽어야 하는 목숨이다. 나와 함께 자유를 찾아가자. 일단 트럭 적재함에 올라타고 방수포를 덮고 숨어라. 내가 신호를 할 경우 방아쇠를 당겨라.”
순간 오누이의 눈이 공포로 떨렸다.
“저는 무서워서 안가겠습니다.” 약속이나 한 듯이 그들은 총을 트럭 운전석에 내던지더니 차에서 뛰어내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미처 설득할 틈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차를 몰고 초소로 갔다. 초소장의 지시를 받은 듯 한 병사가 나왔다. 그가 차단봉을 올리려는 순간 초소 안에서 전화 받는 듯한 소리와 밖에 나간 병사를 찾는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벌써 들켰구나.”
망설일 틈이 없었다. 안 씨는 차를 몰아 차단봉을 그대로 치고 나갔다. 용접한 철제 차단봉이 부러졌다. 그 길로 그는 두만강을 향해 차를 내몰았다. 평소 40분 걸리는 거리를 15분 만에 주파했다.
2014년 호주 시드니에서 북한 정치범실상을 증언하고 있는 안명철 대표. 안명철 대표 제공.
# 권총을 팔아 한국행
산을 하나 넘으니 날이 밝았다. 외진 곳에 농가 두 채가 보였다. 한 집에 뛰어 들어갔다.조선족 농민 부부는 팬티만 입은 남자가 맨발로 아침에 뛰어들자 깜짝 놀랐다.
“조선에서 방금 넘어왔는데 멀리 도망갈 수 있게 도와주시오.”
아내의 입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안 씨가 배낭에서 권총 6정을 차례로 꺼내자 금방 입을 닫았다. 이번엔 남편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더니 “권총을 주면 도와주겠다”고 제안했다. 거절할 겨를이 없었다.
옌지(延吉)까지 데리고 가는데 권총 2정을 달라고 했고, 하얼빈(哈爾濱)까지 가는 기차표를 사주고는 추가로 한 정을 달라고 했다. 밥 한 끼 사준 값이라며 다시 권총 한 정을 요구하더니, 담배 한 갑을 사주면서 또다시 권총 한 정을 받아갔다.
안 씨는 한 정만 남은 권총을 허리에 차고 기차에 올랐다. 최악의 경우 자살을 하기 위한 용도였다. 이제 혼자 헤쳐 나가야 하는 것이다.
저쪽 건너편에서 우리말이 들려왔다. 말을 한 노인에게 다가갔다.
“조선에서 막 넘어왔는데 도와주십시오. 남조선에 가려 합니다.”
그러자 노인이 “김일성 그 놈은 정치를 어떻게 해서 사람들을 굶어 죽이냐”며 욕을 하기 시작했다. 순간 안 씨는 “수령님을 왜 욕해”라는 소리와 함께 저도 모르게 주먹을 휘둘렀다. 노인이 “이놈. 김일성이 싫어 도망쳐 와선 왜 주먹질이냐”고 소리쳤다.
정신이 든 안 씨가 생각해보니 방금 행동은 자기가 생각해도 황당했다.
그는 무릎을 꿇었다.
“미안합니다. 제가 어릴 때부터 너무 교육을 그렇게 받아서 저도 모르게 주먹이 나갔습니다. 제발 용서해주십시오. 저를 도와주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두 시간쯤 지나자 줄담배를 피우던 노인이 화가 풀렸는지 “그럼 내가 도와주겠네”라고 답했다. 나중에 들으니 그는 북한과 한국에 모두 친척이 있는 조선족이었고, 북한을 방문했다가 가난한 친척들의 모습에 분노한 경험도 있었다.
하얼빈에 내려 노인의 도움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노인은 베이징(北京) 한국영사관에 “권총을 차고 온 조선 군인이 한국에 가고 싶어 한다”고 전화를 걸었다. 영사관에 이미 안 씨의 탈북 소식이 전달돼 있었는지, 영사관 직원은 노인에게 당장 베이징까지 함께 와달라고 부탁했다.
벙어리 흉내를 내며 다시 베이징으로 향했다. 18일 새벽 두만강을 넘고 20일에 하얼빈에 도착해 그 다음 날 새벽 베이징에 도착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사흘이었다.
택시기사에게 한국영사관에 가자고 했더니 북한대사관 앞에 내려주었다. 인공기와 김일성 초상화를 보고 질겁한 이들은 다시 택시를 탔다. 이번에는 제대로 한국영사관을 찾았다.
밖으로 나온 영사관 직원은 안 씨가 권총을 차고 있는지를 확인한 뒤 탈북 동기 등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는 어디론가 데려갔다. 10월 3일 안 씨는 마침내 한국에 도착했다.
# 탈북 이후 이야기
그의 탈북 스토리는 “북조선 군경 안명철 무장한 채 동북지방 침입. 공안 포위망 뚫고 한국 도주”라고 중국 변방군인 교육자료에 실패담으로 실려 있다. 권총을 5정이나 챙겼던 조선족은 체포돼 3년형을 선고받았다.
안 씨는 나중에 자신이 탈출한 뒤 22호 정치범수용소에서 벌어진 일들을 전해 들었다. 그를 찾기 위한 두만강 수색 과정에서 추격조가 어둠 속에서 오인사격을 해 군인과 수용소 직원 3명이 죽었다. 이때 사망한 사람의 가족은 얼마 뒤 수용소 직원 거주지역에서 나왔고, 나중에 한국에 도착했다. 그를 포함해 몇 명이 안 씨에게 수용소 후일담을 전해주었다.
북한 내에서 수색에 실패한 뒤 22호 수용소 정치부장인 송치선 대좌의 지휘 하에 수용소 보위원과 고참 군인들로 구성된 수색조 150명이 군용트럭 3대를 이용해 옌지까지 들어왔다. 그곳에서 중국 공안 및 변방대와 함께 계속 수색을 이어갔다. 이들은 11월 24일 안 씨가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한 뒤에야 북한으로 돌아갔다.
운전석에서 뛰어내린 최 씨 오누이는 처형됐다. 함께 도주하지 않았다고 정상참작하기보단 이들을 살려두면 경비병 탈출 사실이 수감자들에게 퍼질 것이 두려워서였다. 차단 초소의 초소장은 공개 처형됐다. 술을 가지러 나간다는 전화를 받고도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소대장은 15호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다. 보위부 상좌인 대대장은 해임돼 군복을 벗었다. 수색조 150명이 옌지를 수색하는 과정에 탈북자 140여 명이 체포돼 북송됐다. 수용소 경비병의 탈북은 그만큼 엄청난 사건이었다. 수용소의 비밀이 외부에 알려져 수령의 권위에 치명타를 안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1994년 11월 24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귀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안명철 씨.
안명철 씨가 탈북했을 당시 중국에 뿌려졌던 수배전단.
# 정치범과의 만남
안 씨는 1969년 함경남도 홍원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군의 식량을 총괄하는 양정사업소 당비서였고, 어머니는 상업관리소 지도원이었다. 아버지는 머슴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도 전쟁고아 12명을 키운 집에서 태어났다. 북한에서 말하는 소위 ‘핵심계층’ 출신이었다. 홍원과 같은 농촌지역에선 안 씨의 부모처럼 부부가 모두 노동당원인 집안도 드물었다.1987년 안 씨는 홍원농업전문학교를 졸업했다. 군에 갈 때가 되자 집에 보위부 지도원이 찾아왔다. 선발과정의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안 씨는 정치범수용소를 지키는 보위부 소속 부대에 입대하게 됐다. 정치범수용소 경비대의 40% 이상은 수용소 관리 보위원 출신 자녀들이다. 20% 정도는 외부 보위원 자녀들이고, 30% 정도는 중앙당 등 고위 간부 자녀들이다. 비밀 유지를 위해 보위부와 고위 간부 출신 자녀들만 선발했다. 안 씨는 출신성분이 좋아 예외적으로 뽑힌 경우였다.
1987년 전국적으로 120명이 정치범수용소 경비대에 입대했다. 이들은 모두 함북 경성 관모봉 아래에 있는 11호 수용소에서 신병교육을 받았다.
안 씨는 지금도 수용소로 들어가던 그날을 잊지 못한다.
“다른 신병들과 함께 트럭을 타고 들어가는데 철문 옆 철조망에서 웅 하고 전기가 흐르는 소리가 크게 들리더군요. 그때 ‘내가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문을 지나치자마자 교관이 차에서 ‘이제부터 만날 사람들과 절대 웃거나 말을 걸지 말라. 너희는 계급의 전초선에 서있는 장군님의 전사’라고 교육을 시키더군요.
골짜기를 따라 조금 올라가는데 길옆에 정말 왜소한 사람들이 옷이라고 볼 수 없는 누더기를 걸친 채 트랙터에 돌을 싣는 모습이 보였어요. 남자는 머리를 빡빡 깎고, 여성은 반쯤 깎은 머리에 하얀 수건을 머리에 둘렀더군요. 그런데 어떤 작은 사람이 엄청 큰 돌을 번쩍 들어 적재함에 싣는 겁니다. 우리는 ‘우와’하며 모두 놀라고 신기해했죠. 그러자 교관이 소리쳤죠. ‘저놈들은 너희의 부모들을 학살했던 반동 놈들과 그 자식 놈들이다. 일말의 동정도 가지면 안 된다.’”
6개월의 신병교육에서 가장 중점을 둔 것은 사상교육이었다. 관모봉 11호 수용소는 두 개의 골짜기로 이뤄졌다. 김일성에게 반기를 들었던 ‘항일투사’ 출신들이 사는 집들이 한 골짜기를 따라 듬성듬성 자리하고 있었다. 돌로 대충 벽을 쌓은 초가집이었다. 김동규 전 부주석, 허봉학 전 군 총정치국장 등이 11호 수용소에 끌려왔던 대표적 빨치산 출신들이다. 이들은 그나마 투사라는 배경이 있어 보위원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늙어가는 이들은 가끔 보위원들을 향해 “내가 산에서 목숨 내걸고 싸워 만든 나라인데 네 놈들이 내게 그따위로 대하냐”고 소리치기도 했다. 그러면 보위원은 “영감, 좀 조용하시오”라고 대꾸했다고 한다. 가끔 김일성이나 김정일이 불러 오라고 하면 유배에서 풀려 잘 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부름을 받지 못하면 그냥 산골에서 늙어 죽는 게 일반적이었다.
다른 골짜기엔 진짜 정치범들이 수감됐다. 이들은 일하는 짐승에 다를 바 없었다.
1989년부터 수용소 통폐합 조치가 이뤄지면서 12개였던 수용소가 6개로 줄었는데 관모봉 11호 수용소도 1990년대 초반 사라졌다.
2016년 김정은을 반인도적 범죄 가해자로 신고한 뒤 네덜란드 헤이그 국제형사재판소(ICC)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는 안명철 대표. 안명철 대표 제공
# 22호 정치범수용소
신병교육을 마친 안 씨는 회령 22호 수용소에 배치됐다. 22호 수용소는 서울 크기의 절반만한 면적에 5만 명이 수감돼 있었다. 탄광 6개에서 석탄 40만t, 5개 지구 19개 농장에선 옥수수 수만t이 각각 생산됐다. 축산 작업반 8개와 식료공장도 있다. 석탄은 김책제철소와 성진제강소에 보내졌고, 돼지고기는 평양으로 올라갔다. 고려호텔 등 북한 고급 호텔과 식당에서 팔리는 ‘감흥로’ 술도 회령에서 정치범들이 만든 것이다.힘을 쓰는 사람은 탄광에 가고, 노약자들은 주로 농촌에 보냈다. 탄광에 간 사람들에겐 하루 300g의 식량이 배급됐는데, 그것으로 일을 시킬 수 없어 풀을 많이 섞여 먹였다.
정치범들은 결혼을 할 수가 없지만 1년에 10~15명 정도 일을 잘하는 수감자들을 선정해 표창결혼을 시킨다. 연애를 할 수가 없으니 보위원이 찍어준 대로 살아야 한다. 이들은 결혼식을 마치면 1주일 합방을 한 뒤 각자 직장에 보내며, 일을 잘해야 한 달에 한 번 만나게 해준다. 아이가 태어나면 수용소 안에 있는 수감자 자녀용 학교에 보낸다.
정치범 관리에는 보위원 1000여 명과 800명 규모의 경비대대 1개, 기타 가족 감시원 등 2000여 명이 동원됐다. 이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다. 사람을 때려죽여도 “보위원에게 반항해 죽였다”고 하면 문제 삼지 않았다. 보위원에게 농락당해 임신한 경우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렸다. 안 씨는 신병 때 분대장이 차량 시동을 거는 쇠막대기로 노인을 때려죽이는 현장을 직접 봤다. 불렀는데 뛰어오지 않고 걸어왔다는 이유였다. 분대장은 자아비판서를 일주일 정도 썼을 뿐 다른 처벌은 받지 않았다.
가끔 공터에 모아놓고 공개처형도 했다. 도주 기도나 기물 파손, 규칙 위반 등이 사유였다. 안 씨는 제대할 때까지 8년 남짓 기간에 20여 건의 공개처형을 목격했다.
“저는 입대하자마자 운전기사가 됐어요. 처형 때 주변을 포위하고 지키는 경비대원을 실어 나르느라 많이 목격한 편이죠.”
공개처형을 할 때는 7,8년차 고참들이 총을 쏘는데, 보복이 두려워 모두 상등병(입대 1년차 병사) 옷으로 갈아입었다.
“입대 1~3년차 경비병들이 수감자들에게 제일 악독하게 행동합니다. 이때는 몸이 근질거려 제어가 되지도 않고, 태권도 훈련을 한다며 구타하기도 하죠. 그런데 오랫동안 있으며 수감자들과 만나 이야기해보면 어이없이 끌려온 그들에게 동정심이 생깁니다. 그래서 고참들은 때리는 자리를 피할 때가 많습니다. 보위원도 동정심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고요.”
안 씨는 수용소 근무 내내 차를 몰고 다녀 직접적으로 사람을 죽일 일은 없었다. 안 씨는 7년 동안 복무해 노동당에 입당했고, 좋은 대학에 진학할 자격도 얻었다.
# 경비병에서 정치범으로
1994년 4월 부대에 전보가 왔다. 아버지가 사망했으니 집으로 돌아오라는 내용이었다. 휴가를 얻은 안 씨가 집에 도착하자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집은 반쯤 무너져 있었고, 어머니는 보위부에 잡혀간 지 이미 한 달이나 됐다고 했다. 12살 여동생이 학교도 가지 못한 채 혼자서 허물어지고 유리창이 다 깨진 집을 지키고 있었다.“아침이 됐는데 갑자기 집안에 돌들이 날아 들어왔어요. 학교 가던 아이들이 ‘반동 놈 집’이라고 소리치며 돌을 던지는 겁니다. 뛰쳐나가려는데 여동생이 ‘오빠, 나가지마’라며 잡아요.”
인터뷰 내내 담담했던 안 씨도 이 대목에선 목소리가 떨렸다.
1994년 고난의 행군이 닥쳐왔다. 사람들이 굶어 죽어갔고, 간부들은 식량을 빼돌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국가 검열이 내려왔을 때 간부들은 양정사업소 당비서인 부친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려 했다.
화가 난 부친은 술김에 “쌀이 없는 것이 간부들의 잘못이냐. 나라가 잘못한 거지”라고 말했는데 보위부에 고발이 들어갔다. 보위부 조사를 받으며 억울함을 감추지 못한 부친은 어느 날 양잿물을 마시고 세상과 작별했다. 북한에서 자살은 체제에 불만이 큰 반동이나 하는 짓으로 인식된다. 이번엔 어머니가 보위부에 끌려갔다. 자살 여부를 가린다며 아버지 묘를 3번이나 파고 부검했다. 안 씨가 집에 도착하기 전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집에서 이틀을 보낸 안 씨는 부대에 복귀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정치범이 돼 15호 관리소(요덕정치범수용소)로 12살 여동생과 함께 끌려갔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뒤늦게 알았지만 국경경비대에 나갔던 남동생도 수용소에 끌려갔다.
안 씨도 수용소 경비원에서 졸지에 정치범으로 내몰릴 상황이었다. 그런데 천운이었는지 마침 그해 7월 김일성이 사망했다. 100일 애도기간 모든 행정이 중단됐다. 그동안 안 씨는 간부들을 만나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지” “너 안 되겠는데”라는 싸늘한 말뿐이었다.
경비대에 있는 동안 안 씨는 여러 정치범들에게 “왜 왔냐”고 물었다. 대개 “하루아침에 이유도 모르고 갑자기 끌려왔다”는 게 주를 이뤘다. 이제 그의 운명도 비슷한 신세가 될 순간이었다. 하루아침에 정치범으로 낙인 찍혀 죽을 때까지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던 것이다. 고민하던 그는 100일 애도기간이 끝나기 한 달 전인 9월 18일 탈북길에 올랐다.
2014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북한 인권 실상을 증언하고 있는 안명철 대표. 안명철 대표 제공
# 평생 걸어져야 할 짐
1994년 11월 24일 안 씨는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정치범수용소의 실상을 폭로했다. 수용소 경비병의 탈북은 최초라 많은 언론의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그를 힘들게 하는 것은 일부 언론의 시선이었다.
“지금까지 했던 정치범 출신 탈북자들의 증언은 피해자이기 때문에 하나를 당하면 열을 당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신은 가해자다. 가해자가 어떻게 피해자보다 더 끔찍한 고발을 할 수 있느냐. 안기부 지시를 받은 것이냐.”
가해자의 프레임은 그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그는 입을 닫았다. 조용히 숨어버렸다. 2009년까지 15년 동안 한 은행에 취직해 과장까지 승진했다. ‘정치범수용소해체운동본부’ 등의 북한 인권단체가 만들어졌을 때도 그는 후원자로만 남았다. 은행에서 희망퇴직을 한 뒤 자영업을 하면서도 조용히 살려고 애썼다.
그런데 수용소 관련 단체에서 힘들다며 연락해왔다. 가보니 직원도 없고, 사무실도 없고, 대표를 하려는 사람도 없었다. 2013년 그는 단체 대표를 떠맡게 됐고, 단체 이름도 ‘엔케이워치’로 바꾸었다. 2016년 김정은을 반인도범죄로 유엔에 제소한 것도 그의 단체다. 이는 2019년 ‘관할권 없음’이라고 결론이 났다.
요즘 그의 단체는 북한에서 일어난 실종, 구금, 고문, 여성차별, 장애인, 아동, 해외노동 등 7개 분야의 조사를 해 유엔에 남기는 것을 핵심 운영목표로 삼고 있다. 실제로 엔케이워치가 작성한 800여 개의 조사 기록들이 현재 유엔에 등록돼 있다.
“2012년 유엔에서 증언을 해달라고 해서 제네바에 갔어요. 그런데 한 유엔 관료가 ‘당신들은 계속 당했다고 하는데 공식적인 증언 자료는 왜 없냐’고 묻더군요. 생각해보니 우리는 말로만 외쳤지 유엔의 기준에 맞춰 문서화를 만드는 것을 못했어요. 그때부터 유엔 기록화 사업에 포커스를 맞추자고 생각했습니다.”
내년 1월 유엔 홈페이지에는 정치범수용소 해체를 위한 대표적 비영리단체(NGO)로 안 씨의 엔케이워치가 등록될 예정이다. 안 씨의 자세한 경력도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된다.
그의 마음에는 늘 무거운 돌이 자리 잡고 있다. 어찌됐든 그는 북한에서 정치범들을 관리하던 가해자였기 때문이다. 수용소 경비병이었다는 이유로 같은 탈북자들에게 고발도 당했다.
“평생 지고 살아야 할 짐이죠. 지금도 악몽을 계속 꿉니다. 정치범수용소 경비병으로 있다가 제대한 뒤 탈북한 사람이 한 명 더 있다고 들었어요. 그는 철저히 신분을 숨기고 살고 있죠. 과거가 알려지면 견디기 어렵기 때문이죠. 저도 그래서 오랫동안 입을 닫고 살았던 것이고요. 그러나 제 마음의 양심이 늘 묻습니다. 지금도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네가 뭐든 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입니다. 수용소 사람들을 어떻게든 살려야 하지 않겠냐고 말입니다. 역설적으로 저는 가해자로 참회하는 마음으로 이 일을 합니다. 제가 지켜봤던 그 억울한 사람들을 세계에 알려서 살리고 싶어서요. 제가 입을 닫으면 누가 그들을 세상에 알립니까. 피해자만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는 가해자의 이야기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지금 이 순간도 수용소에서 학대를 저지르고 있는 보위원과 경비대 군인들에게 ‘세상이 바뀌면 꼭 처벌된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김정은 등 가해자들이 법의 처벌을 받는 순간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신은 믿지 않는데, 혼자 자주 생각해요. 우연히 정치범수용소 경비병으로 발탁된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영화 같은 탈출을 통해 나를 한국까지 오게 만든 힘은 무엇일까. 수용소 경비병으로 갔는데, 어머니와 두 동생이 정치범수용소에서 끌려가 숨을 거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한국에 와서 다 잊고 살고 싶은데 왜 수용소를 고발하는 일로 끝내 들어서게 된 것일까. ‘왜 나일까. 왜 내가 이런 무거운 짐을 걸머져야 할까’고 말입니다.”
인터뷰 내내 그가 벗어던질 수 없는 무거운 돌덩이를 홀로 품고 사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 그를 짓누르는 건 자신이 인생의 한 순간에 ‘가해자’의 편에 서 있었다는 죄책감이었다. 인터뷰를 마치며 그를 위로했다.
“너무 괴로워 마세요. 7년을 가해자로 살았다 하지만 누굴 죽이진 않았잖아요. 그러나 아버지가 자살하고 어머니와 남동생, 12살이던 어린 여동생이 수용소에 끌려가 목숨을 잃은 아픔을 누가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대표님은 북한 정권이 만든 가장 참혹한 피해자이기도 합니다.”
그 순간 늘 무덤덤한 표정이던 그의 눈에서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보았다.
주성하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