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7월 8일
플래시백
“나는 결코 당신을 떠나선 살 수 없고, 당신은 나와 살면 가정과 사회의 배척을 면할 수 없으니 사랑을 위해, 당신을 위해 차라리 한목숨 끊는 것이…”
“(죽어가는 연인을 안으며) 내가 누군지 알겠소?” “세상사람 중에 내가 가장 사랑하는 파건!”
백만장자의 아들과의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번민하다 결국 죽음을 택한 기생 출신 강명화. 동아일보는 1923년 6월 16일자 ‘강명화의 애화’에서 이 사진과 함께 그녀가 목숨을 끊기까지의 내막을 소상히 밝혔다.
그러나 화류계 스타와 백만장자 아들의 로맨스는 사람들의 입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고, 파건의 부친도 이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남자 집안에선 명화를 요부(妖婦)로 여겼고, 아들은 부랑자 취급했습니다. 지친 파건이 한때 명화를 의심하자 명화는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 사랑을 증명하기도 했죠. 결국 둘은 도쿄로 ‘사랑의 도피’를 하게 됩니다. 남자 쪽 도움을 받을 수 없어 명화가 살던 집을 팔아 근근이 생활비를 댔지만 둘에게는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시련은 곧 닥쳐왔습니다. 기생첩을 얻어 놀러 다니는 줄 알았던 도쿄 조선인 고학생들이 이들을 찾아와 “우리 유학생들의 치욕”이라며 행패를 부린 겁니다. 명화가 무고함을 호소하며 칼로 손가락까지 잘랐지만 유학생들의 오해는 풀리지 않았죠. 신변에 위협을 느낀 둘은 다시 경성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남자를 출세시켜 파건의 부친에게 며느리로 인정받겠다는 명화의 꿈은 점점 멀어져 갑니다. 1923년 6월 명화는 파건에게 “몸이 안 좋으니 온양온천에 가자”고 합니다. 평생 사달라고 하지 않던 새 옷도 청해 입었습니다. 그리고 명화는 남자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독약을 마시고 22년의 짧은 삶을 마감합니다.
강명화가 비련의 주인공으로 장안의 화제가 되자 출판업자들도 앞 다퉈 그녀를 소재로 한 책을 내놓았다. 창가의 형식을 띤 것들도 있었고(왼쪽 사진), ‘강명화 실기’(오른쪽), ‘강명화 전’, ‘강명화의 애사’, ‘강명화의 죽엄’ 같은 산문도 인기를 끌었다.
강명화의 슬픈 사랑은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사진은 개봉 하루 전인 1967년 5월 16일 동아일보에 실린 ‘강명화’의 광고. 그녀를 춘향, 황진이, 춘희, 줄리엣에 비유한 카피가 눈에 띈다. 당시 갓 데뷔해 신성일과 호흡을 맞춘 윤정희는 훗날 자신의 대표작 중 하나로 ‘강명화’를 꼽았다.
강명화의 슬픈 사랑은 1924년 일본인 하야카와 고슈의 무성영화 ‘비련의 곡’을 필두로 영화로도 제작됐습니다. 1967년에는 윤정희 신성일이 주연하고 이미자가 주제가를 부른 ‘강명화’가 개봉돼 10만 관객을 모았습니다.
정경준기자 news91@donga.com
원문
康明花(강명화)의 自殺(자살)에 對(대)하야
羅晶月(나정월)
六月(육월) 十五日(십오일) 第一千二十一號(제일천이십일호) 東亞日報(동아일보)를 通(통)하야 『康明花(강명화)의 自殺(자살)』이란 題目(제목) 下(하)에 簡單(간단)한 記事(기사)를 보앗고 其(기) 翌日(익일) 又(우) 此報(차보) 上(상)으로 그의 來歷(내력)의 一欄(일란)을 보앗다. 其(기) 最後(최후)에 하엿단 말을 볼 때에는 내 全身(전신)에 소름이 쭉 끼치고 눈압히 암을암을 하여왓다. 나는 그대로 고개를 땅에 박고 十日(십일) 下午(하오) 十一時頃(십일시경)에 藥(약)을 먹고 十一日(십일일) 下午(하오) 六時(육시) 半(반)에 別世(별세)하엿다는 그거슬 計算(계산)하여 볼 때 二十時間(이십시간)이나 두고 그 死路(사로)에 向(향)하야 苦痛(고통)하고 呻吟(신음)하고 催促(최촉)하엿슬 것이 환-하게 보이며 내 몸이 一層(일층) 욱으러지고 벌벌 떨니엿다.
나는 일즉이 五年(오년) 前(전)에 우리 어머니 도라가실 때 그러케도 一刻(일각)이 밧부게 압하하시든 그 무섭고 두려웟든 記憶(기억)이 번개가치 내 머리에 왓다갓다 하엿다.(나는 언제든지 누가 죽엇다 하면 반다시 이런 經驗(경험)을 한다.) 아! 무서워! 아! 무서워. 그 압흔 길을 엇더케 갓슬가. 왜 그런 어렵고 두려운 길을 選擇(선택)하얏슬가? 아이구 무서워! 아이구 참말 무서운 길!
나는 이때 마침 病席(병석)에 잇서서 生路(생로)에 第一(제일) 重大(중대)한 條件(조건)인 飮食(음식)을 먹지 못하는 苦痛(고통)과 또 無數(무수)한 일을 두고 勞動(노동)할 氣力(기력)이 업서 悲觀(비관)하는 過敏(과민)한 神經(신경)으로서 偶然(우연)히 康(강) 氏(씨)의 自殺(자살)에 對(대)하야 同感(동감) 同情(동정)할 點(점)이 多(다)하엿슬 뿐 아니라 可否(가부)로 分析(분석)해볼 만치 餘裕(여유)가 잇는 好機會(호기회)이엿다.
그러나 오직 그의 自殺(자살) 內容(내용) 全體(전체)가 妓生(기생) 生活(생활)로 因(인)한 卽(즉) 내가 살아온 家庭(가정)이나 社會(사회)와는 別世界(별세계)이엿든 그의 煩悶(번민)과 苦痛(고통)인 經路(경로)에 對(대)하야는 나로서는 能(능)히 알지 못할 點(점)이 만흔 것은 事實(사실)이오 큰 遺憾(유감)일다. 그러나 나는 何(하) 社會(사회)의 人事(인사)를 勿論(물론)하고 그 『사람』인 本能性(본능성)은 一般(일반)이라고 生覺(생각)한다. 그럼으로 누구든지 사람으로서는 生(생)에 대한 欲望(욕망) 死(사)에 대한 恐怖心(공포심)이 强弱(강약)大小(대소)의 差(차)는 잇슬지언정 그 素質(소질)을 兼備(겸비)하고 잇는 줄 안다. 그럼으로 이 通性(통성) 上(상)으로 보아 小小(소소)한 事情(사정)을 除(제)하고는 大體(대체)로 能(능)히 同感(동감) 同情(동정)할 수 잇는 것이라고 生覺(생각)한다.
더구나 此(차) 問題(문제)에 入(입)하야는 갓흔 女性(여성)인 出演者(출연자) 갓흔 朝鮮(조선)의 背景(배경) 갓흔 過渡期(과도기)인 舞臺(무대) 갓흔 風俗(풍속) 習慣(습관)의 脚本(각본) 中(중)에 잇는 우리가 그 自殺(자살) 動機(동기)의 秘密(비밀)을 알 것이오 또 알아야 할 것일다. 이로 因緣(인연) 삼아 우리 朝鮮(조선) 女子(여자)들의 前途(전도)에 繼續(계속)할 生(생)의 理由(이유)를 確立(확립)하여야 하겟고 自殺(자살)의 無意味(무의미)를 自醒(자성)하여야 할 것일다.
이럼으로써 비로소 우리의 生活(생활)에는 아-모 矛盾(모순) 업는 熱情(열정)이 잇슬 거시오 努力的(노력적)일 것이오 樂觀的(낙관적)일 것일다. 이 意味(의미)로 보아 生死(생사)의 問題(문제)는 確實(확실)히 우리 生活(생활)動機(동기) 中(중)의 基礎(기초)가 되고 또 全部(전부)인 줄 안다. 나는 이 一念(일념) 下(하)에 爲先(위선) 나부터의 내 彷徨(방황)하는 生活(생활)을 確立(확립)키 爲(위)하야 此(차) 問題(문제)에 對(대)하야 感想(감상)을 略述(약술)할가 함일다.
鍾路(종로) 腹板(복판)에 서서 南山(남산)을 바라볼 때 萬一(만일) 그 山頂(산정)에 正立(정립)한 사람이 보인다 하면 그 사람은 마치 天使(천사)와 가치 보히리라. 그리하야 天癡(천치) 無感覺者(무감각자)를 除(제)하고는 누구든지 이 몬지 투성인 市街(시가)에서 떠나 저긔 저 사람과 가치 新鮮(신선)하고 淸潔(청결)하고 景致(경치) 조흔 저 꼭닥이에 올나가서 長安(장안)을 내려다보는 天上人(천상인)이 되고저 하는 希望(희망)이 잇슬 것이다.
只今(지금) 朝鮮(조선) 妓生界(기생계)의 一般(일반) 精神(정신)이 이러하다. 其(기) 中(중)에 聰明(총명)한 者(자)면 者(자)일사록 自己(자기)의 其(기) 奴隸的(노예적) 生活(생활) 非人道的(비인도적) 生活(생활)에서 躍出(약출)하야 다른 사람과 갓흔 사람다운 生活(생활)을 해보려는 理想(이상)이 잇고 實行(실행)을 하려든다. 그리하야 머리 올니고 구두 신은 女學生(여학생)만 보면 다 善(선)이고 다 美(미)이며 一夫一婦(일부일부)의 新(신) 家庭生活(가정생활)을 볼 때는 滋味(자미)가 깨가 쏘다질 듯 십고 幸福(행복)이 無限量(무한량)할 듯 십게 보인다. 그러할 때 自己(자기) 몸을 도라보면 모든 거시 惡(악)이오 醜(추)이며 地獄(지옥)불에 따러저 허덕허덕하는 듯 십다.
世界(세계)가 넓다하되 오직 한 몸의 安居(안거)할 바이 업고 사람이 만흐다 하되 오직 한 사람의 가삼에서 끌는 피 사랑을 밧지 못하고 또 줄ㅅ곳이 업는 妓生(기생)들노서는 맛당히 渴望(갈망)할 일이다.
及(급) 其(기) 山頂(산정)에 至(지)하면 『별 것이 아니엿다』 失望(실망)을 할 만큼 누구나 決(결)코 그 境遇(경우)에 滿足(만족)하는 者(자)가 업다. 幸福(행복)이 잇섯다 하면 山頂(산정)에 到達(도달)하엿슬 其(기) 瞬間(순간)일 뿐이오 그것도 발서 過去(과거)의 것으로 도라갓슬 뿐일다. 이거시 人生(인생)인 것을 冷靜(냉정)하게 生覺(생각)할 餘裕(여유)조차 업슬이만치 妓生(기생)의 生活(생활)은 乾燥無味(건조무미)하고 虛僞寂寞(허위적막)일다.
幸福(행복)과 滿足(만족)은 決(결)코 非我(비아)로서 求(구)할 바이 아니오 반드시 自己(자기) 內心(내심)의 作用(작용)으로 말매암아 永遠(영원)토록 一新(일신) 一變(일변)하는 늣김을 엇을 수 잇는 것을 또한 妓生(기생)과 如(여)한 感情生活(감정생활) 氣分生活者(기분생활자)로서는 도저히 自覺(자각)할 수 업슬 것일다.
康(강) 氏(씨)의 今番(금번) 自殺(자살)의 原因(원인)도 確實(확실)히 여긔 잇는 것일다. 卽(즉) 個人的(개인적) 生(생)의 尊嚴(존엄)과 其(기) 生(생)을 展開(전개)하여 갈 力量(역량)의 豐富(풍부)한 것을 自信(자신)하면서 어대까지 할 수 잇는 대로 살녀고 하는 것이 現代人(현대인)의 理想(이상)이오 其(기) 生(생)의 全部(전부)를 展開(전개)하랴고 努力(노력)하는 一切(일체)의 行爲(행위)가 幸福(행복)이오 滿足(만족)인 것을 일즉이 自覺(자각)하엿든들 種種(종종) 잇는 抵抗力(저항력)의 缺乏(결핍)한 者(자)들이 境遇(경우)의 壓迫(압박)에 不堪(불감)하야 生活意志(생활의지)의 强慾(강욕)을 失(실)하고 一身(일신)의 純潔(순결)을 保存(보존)키 爲(위)하야 스스로 死(사)를 促迫(촉박)하는대 不陷(불함)하엿슬 뿐 아니라 炎熱的(염열적) 生存慾(생존욕) 奮鬪(분투) 努力心(노력심)이 尤甚(우심) 尤加(우가)하엿슬 것이다.
記事(기사) 中(중)에 그는 張(장) 氏(씨)에게 對(대)하야 이러케 말을 하엿다 한다. 『나는 決(결)코 당신을 떠나서는 살어잇슬 수가 업고 당신은 나하고 살면 社會(사회)와 家庭(가정)의 排斥(배척)을 免(면)할 수가 업스니 차라리 사랑을 爲(위)하고 당신을 爲(위)하야 한목숨을 끗는 것이 올소』 하엿다 한다. 얼마나 煩悶(번민) 苦痛(고통)을 쌋코 싸어 견딀 수 업고 참을 수 업서 한 말인지 實(실)로 눈물지어 同情(동정)할 말일다.
나는 언제든지 自由戀愛(자유연애) 문제가 討論(토론)될 때는 朝鮮(조선) 女子(여자) 中(중)에 戀愛(연애)를 할 줄 안다 하면 妓生(기생)밧게는 업다고 말하야왓다. 實(실)로 女學生界(여학생계)는 넘우 異性(이성)에 대한 交際(교제)의 經驗(경험)이 업슴으로 다만 그 異性(이성) 間(간)에 在(재)한 不可思議(불가사의)한 本能性(본능성)으로만 無意識(무의식)하게 異性(이성)에게 接(접)할 수 잇스나 오직 妓生界(기생계)에는 異性(이성) 交際(교제)의 充分(충분)한 經驗(경험)으로 其(기) 人物(인물)을 選擇(선택)할 만한 判斷力(판단력)이 잇고 衆人(중인) 中(중)에서 오직 一人(일인)을 조와할 만한 機會(기회)가 잇슴으로 女學生界(여학생계)의 사랑은 被動的(피동적)이오 一時的(일시적)인 反面(반면)에 妓生界(기생계)의 이러한 者(자)에 限(한)하야만은 自動的(자동적)이오 永續的(영속적)인 줄 안다. 그럼으로 朝鮮(조선)에 萬一(만일) 女子(여자)로서 眞情(진정)한 사랑을 할 줄 알고 줄 줄 아는 者(자)는 妓生界(기생계)를 除(제)하고는 업다고 말할 수 잇는 것일다.
이 意味(의미)로 보아 張(장) 氏(씨)의 人物(인물) 如何(여하)는 勿論(물론)하고 康(강) 氏(씨)가 스스로 늣기는 처음 사랑을 깁히 깁히 張(장) 氏(씨)에게 對(대)하야 늣겻슬 줄 밋는다. 此(차)에 不拘(불구)하고 其(기) 境遇(경우)가 愛人(애인)과 同居(동거)치 못할 處地(처지)에 잇서 同居(동거)치 못할 수는 업겟다는 決心(결심)이 잇다 하면 實(실)로 難處(난처)한 問題(문제)일다. 이와 가치 氏(씨)는 非運(비운)에 견듸다 못함으로 戀愛(연애)의 徹底(철저)를 求(구)하기 爲(위)하야 貞操(정조)의 純一(순일)을 保守(보수)하기 爲(위)하야 自己(자기) 精神(정신)의 潔白(결백)을 發表(발표)하기 爲(위)하야 世態(세태)를 憤怒(분노)하기 爲(위)하야 自殺(자살)을 實行(실행)한 것일다.
그러나 動機(동기)는 如何(여하)하든지 自己(자기) 生命(생명)을 끗는 것은 다 自暴自棄(자포자기)의 行爲(행위)일다. 生命(생명)의 尊貴(존귀)와 其(기) 生命(생명) 力量(역량)의 豐富(풍부)를 自覺(자각)한 現代人(현대인)의 取(취)할 方法(방법)은 안일다. 어대까지든지 살냐고 드는대 戀愛(연애)의 徹底(철저)며 貞操(정조)의 一貫(일관)이며 精神(정신)의 潔白(결백)이 實現(실현)될 것일다. 何故(하고)오 하면 살냐고 하는 努力(노력)에 잇서야만 此等(차등)의 條件(조건)은 價値(가치)가 잇는 것이오 살냐고 하는 것을 除(제)하고는 一切(일체)이 虛務(허무)인 즉 世態(세태)의 混亂(혼란)을 憤怒(분노)하는 것도 좃치마는 그것뿐으로만은 살기 爲(위)하는 努力(노력)이 不足(부족)하다.
況(황) 그로 因(인)하야 스스로 憤死(분사)하는 것은 第一(제일) 붓그러워할 만한 卑怯(비겁)한 行爲(행위)일다. 眞心(진심)으로 世態(세태)를 憤怒(분노)한다 하면 自進(자진)하야 世態(세태)를 改造(개조)하는 責任(책임)을 깨다를 것일다. 或(혹) 氏(씨)에게는 이러케 冷靜(냉정)하게 本末(본말) 理致(이치)를 生覺(생각)해볼 餘裕(여유)조차 업시 그 煩悶(번민) 苦痛(고통)이 高度(고도)에 達(달)하엿슬는지도 모르겟다. 그리하야 그의 一片(일편)의 가삼 속에는 善惡(선악) 悲痛(비통) 歡樂(환락)의 相對(상대)가 生(생)이라 하면 此等(차등)의 差別(차별)을 超越(초월)한 絶對(절대) 一如(일여)한 世界(세계)가 死(사)로 보엿슬는지도 모른다. 이 意味(의미)로 死(사)를 絶對(절대)의 安靜(안정)으로 解(해)하엿슬 것일다.
누구든지 死(사)의 恐怖(공포)를 感覺(감각)하면 그것은 즉 『如何(여하)하게 살아갈가』하는 目的(목적)이 잇슴이오 何時(하시)든지 生(생)의 欲望(욕망)을 放棄(방기)하면 곳 絶對(절대)의 安靜(안정)인 世界(세계)가 나타날 것일다. 그리하야 生(생)의 欲望(욕망)과 相對(상대)함으로 비로소 死(사)가 恐怖(공포)될 것과 가치 絶對(절대)의 死(사)는 두려운 것이 아니오 오직 相對(상대)의 死(사)를 두려워하는 것인 줄 안다.
氏(씨)의게는 相對(상대)의 死(사)를 두려워할 만한 堅固(견고)한 意志(의지)가 업섯고 그만한 敎育(교육)이 업섯스며 自己(자기) 一(일) 生命(생명)의 存在(존재)를 自信(자신)할 만한 아모 能力(능력)과 希望(희망)이 업섯슴으로 起因(기인)한 悲觀(비관)이오 新(신) 輿論(여론)을 起(기)함으로 自己(자기)의 戀愛(연애)를 一切(일체) 新鮮化(신선화)하랴는 虛榮心(허영심)일다. 卽(즉) 新式(신식)에 流行(유행)하는 新思想(신사상)에 물드럿다고 하는 非難(비난)은 免(면)할 수 업슬 것일다.
勿論(물론) 누구든지 自殺(자살)하는 內面(내면)에는 素質(소질)의 薄弱(박약)함과 境遇(경우)의 不良(불량)과 敎育(교육)의 不足(부족)인 原因(원인)이 잇슬 것일다. 그러나 多數(다수)는 이 運命(운명)을 무슨 宿命(숙명)과 가치 알아 不可變(불가변)할 八字(팔자)로 定(정)함으로 그 運命(운명)의 大部分(대부분)을 展開(전개)할 만한 力量(역량)의 自覺(자각)이 업시 自殺(자살)에까지 至(지)하는 것일다. 그리하야 如何(여하)한 動機(동기)의 自殺(자살)이든지 무엇이든지 自己(자기)의 思慮(사려)로 負擔(부담)할 수 업는 事件(사건)을 맛나면 目前(목전)의 苦痛(고통)을 避(피)하기 爲(위)하야 模倣性(모방성)으로 나오는 이 錯誤(착오)된 生覺(생각)을 唯一(유일)의 支柱(지주)로 알고 輕率(경솔)히 實行(실행)하는 것은 其實(기실) 아모 것도 아니오 無能力(무능력)하다는 證據(증거)인 厭世的(염세적) 自暴自棄(자포자기)의 行動(행동)일다.
누구든지 子息(자식)을 나아보고 길너본 者(자)는 알 것이라. 母胎(모태)로부터 얼만콤 甚酷(심혹)한 苦痛(고통)을 우리 어머니에게 끼치고 또 우리가 經驗(경험)하엿섯는지 얼만한 偉大(위대)한 慈愛(자애)의 늣김을 밧고 주고 하는지!
우리의 목숨은 決(결)코 그러케 헐갑 가진 것이 아니다. 내 목숨이되 내가 끈을 아모 權利(권리)가 업는 것일다. 내 몸은 決(결)코 내 所有(소유)가 아닐다. 우리 어머니 것이엇고 우리 祖上(조상)의 것이엇스며 내 社會(사회)의 物件(물건)일다. 내 生命(생명)의 繼續(계속)되는 最後(최후)까지 내 힘을 盡(진)하야 남들의 하는 것을 다 해보는 수밧게 다른 아모 報恩(보은)될 만한 것이 업는 줄 안다.
남과 가치 幸福(행복)스럽고 滿足(만족)한 生活(생활)을 좀 못하기로 무슨 그다지 크게 自暴自棄(자포자기)할 것이 무엇이랴. 나 할 때까지 내 일만 하면 또한 이것이 幸福(행복)스럽고 滿足(만족)할 수 잇슬 것이 아닐는지?
自殺(자살)은 個人(개인)의 自由(자유)요 權利(권리)라고 말할는지 모르나 權利(권리)는 他人(타인)의 權利(권리)를 侵害(침해)치 못한다는 條件(조건)이 잇다 하면 其人(기인)의 自殺(자살)로 因(인)하야 家族(가족)이나 社會(사회)에 損害(손해)를 끼치는 危險(위험)이 잇다 하면 權利(권리)의 正當(정당)한 行使(행사)가 아니오 도리혀 不法(불법) 非理(비리)의 行爲(행위)일 것이오 他殺(타살)과 一樣(일양)으로 罪惡(죄악)으로 볼 수밧게 업는 것일다. 如何(여하)한 動機(동기)의 自殺(자살)을 勿論(물론)하고 同情(동정)하고 讚美(찬미)할 理由(이유)는 아모리 生覺(생각)하여도 업슬 것일다.
連(연)하야 漢江鐵橋(한강철교) 上(상) 自殺(자살)에 對(대)한 記事(기사)를 보앗다. 絶對(절대)의 安靜(안정) 世界(세계)로 向(향)하는 그네들은 如何間(여하간) 근심 걱정 다 바리니 便安(편안)할는지 모로거니와 그 後面(후면)에 잇서 사러보랴고 애쓰는 우리들을 爲(위)하야 一憂(일우)를 加(가)하여주기를 바란다. 우리들의 處地(처지)가 꼭 죽어야만 할 것인지 모르지마는 그래도 좀 더 살아보고 싶다, 요 고비만 눈 꿈적 넘겨보고 싶다, 설마 꼭 요대로만 살나는 法(법)이 어대 잇스랴. 다 갓흔 人生(인생)으로!
그러지 아니해도 朝鮮(조선) 사람의 生活(생활)의 全部(전부)는 代代(대대)로 죽지 못하야 살어가는 살님이엇다. 아모 살 리유가 업섯고 自覺(자각)이 업셧고 努力(노력)이 업섯스며 熱情(열정)이 업는 오직 죽음의 차레를 苦待(고대)하고 잇섯슬 뿐이엿다. 게다가 一層(일층) 自殺(자살)의 實行者(실행자) 決心者(결심자)까지 나면 우리 살냐고 하는 사람들의 精神(정신)에는 每樣(매양) 刺戟(자극)을 밧게 되고 彷徨(방황)을 엇게 된다. 個人(개인)이나 社會(사회)를 勿論(물론)하고 順境(순경)에 在(재)함보다도 逆境(역경)에 在(재)함으로 비로소 구더지고 여물어지는 것이다. 此(차)에서 出(출)하는 人物(인물)이야 偉大(위대)한 人物(인물)이오 此(차)에서 出(출)한 思想(사상)이라야 徹底(철저)한 思想(사상)일 것이오 此(차)에서 出(출)한 藝術(예술)이라야 深奧(심오)한 藝術(예술)일 것이라.
此(차)는 過去(과거) 露西亞(노서아) 狀態(상태)로 實例(실례)를 擧(거)할 수 잇슴과 가치 우리의 이 한 고븨를 참고 익여 사라가는데 朝鮮(조선) 사람의 民族的(민족적) 生活(생활) 根地(근지)가 徹底(철저)하게 잡힐 줄 안다. 더구나 此(차)에 直接(직접) 又(우)는 間接(간접)으로의 任務者(임무자)인 우리 一般(일반) 女子(여자)들은 現代人(현대인)의 살아가는 理想(이상)은 前日(전일)과 如(여)히 破壞的(파괴적)이오 否定的(부정적)이오 消極的(소극적)의 思想(사상)은 內在(내재)치 아니하고 徹頭徹尾(철두철미)하게 우리들의 理想(이상)은 建設的(건설적)이오 肯定的(긍정적)이오 積極的(적극적)으로 生(생)의 開展(개전)이 잇슬 뿐이오 死(사)는 理想(이상)의 敵(적)으로 알고 그것을 우리의 힘껏 征服(정복)하랴는 決心(결심) 下(하)에 自殺(자살)의 行爲(행위)를 平凡化(평범화)하고 醜化(추화)하고 愚劣化(우열화)하고 罪惡化(죄악화)하는 傾向(경향)이 잇기를 바란다.
結論(결론)에 至(지)하야 康(강) 氏(씨)와 如(여)한 明敏(명민)한 頭腦(두뇌)와 美麗(미려)한 容貌(용모)와 熱情(열정)의 가삼이 虛無(허무)에 歸(귀)한 거슬 知者(지자) 中(중) 一人(일인)으로 哀悼(애도)하며 一念(일념)을 靈前(영전)에 듸리고저 하다. (六月 二十一日·육월 이십일일)
현대문
강명화의 자살에 대해
나정월
6월 15일 제1021호 동아일보를 통해 ‘강명화의 자살’이란 제하의 간단한 기사를 보았고, 그 다음날 또 이 신문 상에서 그의 내력이 실린 난을 보았다. 그가 마지막에 했다는 말을 볼 때 나는 전신에 소름이 쭉 끼치고 눈앞이 아물아물해졌다. 나는 그대로 고개를 땅에 박고 10일 오후 11시경 약을 먹고 11일 오후 6시 반에 별세했다는 것을 계산해 볼 때 20시간 동안이나 죽음의 길을 향해 고통하고 신음하고 죽음을 재촉했을 것이 환하게 그려져 내 몸은 한층 우그러지고 벌벌 떨렸다.
나는 일찍이 5년 전 우리 어머니 돌아가실 때 그가 그렇게도 한 순간이 바쁘게 아파하시던 무섭고 두려웠던 기억이 번개같이 내 머리에 왔다 갔다 했다.(나는 언제든 누가 죽었다 하면 반드시 이런 경험을 한다.) 아! 무서워! 아! 무서워! 그 아픈 길을 어떻게 갔을까. 왜 그런 어렵고 두려운 길을 선택했을까. 아이고 무서워! 아이고 정말 무서운 죽음의 길!
나는 이때 마침 병석에 있어서 생로에 가장 중대한 조건인 음식을 먹지 못하는 고통을 느끼며, 또 무수히 많은 일을 두고 노동할 기력이 없어 비관하는 신경과민인 상태에서 우연히 강 씨의 자살에 대해 동감, 동정할 점이 많았을 뿐 아니라 옳고 그름을 분석해볼 만큼 여유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오직 그의 자살 내용 전체가 기생 생활에 따른 것인 즉, 내가 살아온 가정이나 사회와 다른 세계였던 그의 번민과 고통의 경로에 대해 나로서는 능히 알지 못할 점이 많은 것은 사실이요, 큰 유감이다. 하지만 나는 어느 사회의 인사를 막론하고 그 ‘사람’인 본능은 매한가지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강약 대소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 본성에 삶에 대한 욕망, 죽음에 대한 공포를 겸비하고 있는 줄 안다. 그러므로 이 공통의 본성 상 소소한 사정을 빼고는 대체로 능히 동감, 동정할 수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더구나 이 문제에 있어서는 같은 여성, 같은 조선의 배경, 같은 과도기인 무대, 같은 풍속 습관을 갖고 있는 우리가 그 자살 동기의 비밀을 알 것이요, 또 알아야 할 것이다. 이를 인연삼아 우리 조선 여자들의 앞길에 계속할 삶의 이유를 확립해야 하겠고, 자살의 무의미를 스스로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생활에 비로소 아무 모순 없는 열정이 있을 것이요, 노력할 것이며, 낙관적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생사의 문제는 확실히 우리 생활 동기의 기초가 되고 또 전부이인 줄로 안다. 나는 이 일념 아래 우선 나부터 내 방황하는 생활을 굳게 세우기 위해 이 문제에 대한 감상을 간단히 서술할까 한다.
종로 복판에 서서 남산을 바라볼 대 만일 그 산중에 우뚝 선 사람이 보인다면 그 사람은 천사와 같이 보일 것이다. 그래서 천치이거나 무감각한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든 이 먼지투성이인 시가를 떠나 저기 저 사람과 같이 신선하고 청결하고 경치 좋은 저 꼭대기에 올라 장안을 내려다보는 천상의 사람이 되고자 하는 희망이 있을 것이다.
지금 조선기생 세계의 일반적인 정신이 이와 같다. 그 중 총명한 사람이면 더욱 자기의 노예와 같은 생활, 비인도적 생활을 뛰어 벗어나 다른 사람과 같은 사람다운 생활을 해보려는 이상이 있고, 이를 실행하려 든다. 그리하여 머리 올리고 구두를 신은 여학생만 보면 다 ‘훌륭함’이고, 다 ‘아름다움’이며, 일부일처의 새 가정생활을 보면 재미가 깨가 쏟아질 듯싶고 행복이 무한할 듯싶어 보인다. 그럴 때 자기 몸을 돌아보면 모든 것이 ‘악’이요, ‘추함’이며, 지옥 불에 떨어져 허덕허덕하는 듯싶다.
세계가 넓다하되 오직 이 한 몸 편안하게 뉘일 곳이 없고, 사람이 많다하되 오직 한 사람의 마음에서 끓는 피, 사랑을 받지 못하고 줄 곳도 없는 기생들로서는 마땅히 갈망할 일이다.
급기야 그 산꼭대기에 이르면 ‘별 것 아니었다’고 실망할 만큼 누구나 결코 그 경우에 만족하는 이가 없다. 행복이 있었다 하면 산정에 도달하는 그 순간일 뿐, 그것도 벌써 과거의 것으로 돌아갔을 뿐이다. 이것이 인생인 것을 냉정하게 생각할 여유조차 없으리만치 기생의 생활은 건조무미하고 실속 없이 쓸쓸하다.
행복과 만족은 결코 남에게서 구할 바가 아니요, 반드시 자기 내심이 작용해야만 영원토록 새롭게 변하는 느낌을 얻을 수 있는 것인데, 기생과 같은 감정생활, 기분생활을 하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자각할 수 없을 것이다.
이번 강 씨의 자살 원인도 확실히 여기에 있는 것이다. 즉 스스로 개인적 삶의 존엄과 삶을 전개해갈 역량의 풍부함을 믿으며 어디까지든 할 수 있는 대로 살아보려고 하는 것이 현대인의 이상이요, 삶의 전부를 펼쳐보려고 노력하는 행위 일체가 행복이요, 만족인 것을 일찍이 자각했던들 종종 있는 저항력 결핍자들이 형편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생활의지의 욕구를 잃고 일신의 순결을 보존하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재촉하는 데 빠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불타는 생존욕구 분투에 노력하려는 마음이 더욱 심하고 더해졌을 것이다.
기사 중에 강명화는 장 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한다. “나는 결코 당신을 떠나선 살 수 없고 당신은 나와 살면 사회와 가정의 배척을 면할 수 없으니 차라리 사랑을 위해, 당신을 위해 이 한 목숨 끊는 것이 옳소.” 얼마나 번민, 고통을 쌓고 쌓아 견딜 수 없고, 참을 수 없어 한 말인지 실로 눈물지어 동정할 일이다.
나는 언제든지 지유연애 문제가 토론 석상에 오를 때는 조선여자 중 연애를 할 줄 안다 하려면 기생밖에는 없다고 말했었다. 실로 여학생 세계는 너무 이성교제 경험이 없으므로 다만 그 이성 사이의 불가사의한 본능으로만 무의식적으로 이성에 접할 수 있지만, 기생 세계는 이성교제의 충분한 경험이 있어 인물을 선택할 만한 판단력이 있고, 여러 사람 중 오직 한 사람만을 좋아할 만한 기회가 있으므로 여학생들의 사랑은 피동적이요 일시적인 반면, 기생은 이런 것에 한해서는 능동적이요, 영속적인 줄 안다. 그러므로 조선에 만일 여자로서 진정한 사랑을 할 줄 알고, 또 줄 줄 아는 자는 기생을 빼고는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의미로 보아 장 씨의 인물 여하는 말할 것도 없고, 강명화는 스스로 느끼는 처음 사랑을 그에 대해 깊이깊이 느꼈을 줄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 수 없는 처지여서 동거하지 않으며 안 되겠다는 결심이 있다 하면 실로 난처한 문제다. 이와 같이 강명화는 비운을 못 견디고 철저한 연애를 구하기 위해, 정조의 순수를 지키기 위해, 자기 정신의 결백을 드러내기 위해, 세태에 분노하기 위해 자살을 결행한 것이다.
그러나 동기가 어떻든 자기 생명을 끊는 것은 다 자포자기의 행위다. 생명의 존귀와 생명 역량의 풍부를 스스로 깨달은 현대인이 취할 방법은 아니다. 어디까지든 살려고 드는 데서 연애의 철저며, 정조의 일관이며, 정신의 결백이 실현될 것이다. 왜냐 하면 살려는 노력이 있어야만 이들 조건은 가치가 있는 것이요, 살려고 하는 것을 빼고는 일체가 허무인 즉, 세태의 혼란을 분노하는 것도 좋지만 그것만으로는 살려는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그로 인해 스스로 분에 못 이겨 죽는 것은 제일 부끄러워할 만한 비겁한 행위이다. 진심으로 세태를 분노한다면 자진해서 세태를 개조할 책임을 깨달아야 한다. 혹 강 씨에게는 이렇게 냉정하게 본말과 이치를 생각해볼 여유조차 없이 그 번민과 고통이 고도에 달했을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의 일편 가슴 속에는 선악, 비통, 환락의 상대가 삶이라 하면 이들 차별을 초월한 단 하나의 절대 세계가 죽음으로 보였을 지도 모른다. 이런 뜻으로 죽음을 절대 안정으로 풀이했을 것이다.
누구든 죽음의 공포를 느끼면 그것은 즉 ‘어떻게 살아갈까’하는 목적이 있음이요, 언제든 삶의 욕망을 내팽개치면 곧 절대 안정인 세계가 나타날 것이다. 그리하여 삶의 욕망과 상대하므로 비로소 죽음이 공포가 되는 것과 같이 ‘절대의 죽음’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오직 ‘상대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인 줄 안다.
강 씨에게 상대의 죽음을 두려워할 만한 굳은 의지가 없었고, 그만한 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자기 한 생명의 존재를 자신할 만한 아무런 능력과 희망이 없었던 데에 기인한 비관이요, 신 여론을 일으켜 자신의 연애 일체를 새롭고 산뜻하게 하려는 허영심이다. 즉 신식에 유행하는 신사상에 물들었다고 하는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누구든지 자살하는 내면에는 소질의 박약함, 형편의 불량, 교육의 부족 등의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이 운명을 숙명과 같이 알고 바꿀 수 없는 팔자라고 생각해 운명의 대부분을 전개할 만한 역량의 자각도 없이 자살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동기의 자살이든 자기의 분별로 감당할 수 없는 사건을 만나면 눈앞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모방에서 나오는 이 그릇된 생각을 유일한 지주로 알고 경솔하게 실행하는 것은 사실 아무 것도 아니라 무능력하다는 증거인 염세적 자포자기의 행동이다.
누구든지 자식을 낳아 길러본 사람은 알 것이다. 모태로부터 얼마만큼 극심한 고통을 우리 어머니에게 끼치고 또 우리가 경험했었는지, 출생의 순간 얼마만큼 위대한 자애의 느낌을 주고받는지!
우리의 목숨은 결코 그렇게 헐값이 아니다. 내 목숨이지만 내가 끊을 아무런 권리가 없다. 내 몸은 결코 내 소유가 아니다. 우리 어머니의 것이었고, 우리 조상의 것이었으며, 내 사회의 물건이다. 내 생명이 계속되는 최후까지 힘을 다해 남들이 하는 것을 다 해보는 수밖에 다른 아무 은혜를 갚을 만한 것이 없는 줄 안다.
남과 같이 행복하고 만족하는 생활을 좀 못하기로 무슨 그다지 크게 자포자기할 것이 있으랴. 할 수 있을 때까지 내 일만 하면 또한 이것이 행복스럽고 만족할 수 있을 것이 아닐지?
자살이 개인의 자유, 권리라 할지도 모르겠지만 권리는 타인의 권리를 침해할 수 없다는 조건이 있다 하면 그 사람의 자살로 가족과 사회에 손해를 끼치는 위험이 있다 하면 권리의 정당한 행사가 아니라 도리어 불법, 비리의 행위일 것이요, 타살과 같은 죄악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떤 동기의 자살을 막론하고 동정하고 찬미할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없을 것 같다.
이어 한강철교 위 자살에 대한 기사를 보았다. 절대의 안정세계로 향하는 그네들은 어쨌든 근심 걱정 다 버리니 편안할지 모르거니와 그 뒤에서 살아보려고 애쓰는 우리들을 위해 한 번 더 생각해주기 바란다. 우리들의 처지가 꼭 죽어야만 할 것인지 모르지만, 그래도 좀 살아보자, 이 고비만 눈 딱 감고 넘겨보고 싶다, 설마 꼭 이대로만 살라는 법이 어디 있으랴. 다 같은 인생인데!
그렇지 않아도 조선 사람의 생활 전부는 대대로 죽지 못해 살아가는 살림이었다. 아무 살 이유가 없었고, 자각이 없었고, 노력이 없었으며, 열정이 없이 오직 죽을 차례만 고대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게다가 한층 더 자살을 결심하고 실행하는 사람까지 나오면 우리 살려는 사람들의 정신은 항상 자극을 받고 방황하게 된다. 개인이나 사회를 막론하고 순조로운 환경에 있는 때보다 역경에 처해 비로소 굳어지고 여물어지는 법이다. 여기서 나오는 인물이어야 위대한 인물이요, 여기서 나오는 사상이라야 철저한 사상일 것이요, 여기서 나오는 예술이라야 심오한 예술일 것이다.
이는 과거 러시아의 상태로 실례를 들 수 있는 것과 같이 우리가 이 한 고비를 참고 이겨내 살아가는데 조선 사람의 민족적 생활 근거지가 철저하게 잡힐 것으로 안다. 더구나 이에 직간접적인 임무를 띠고 있는 우리 일반 여자들은 현대인으로 살아가는 이상은 과거와 같이 파괴적, 부정적, 소극적 사상은 내재하지 않고 철두철미하게 우리들의 이상은 건설적, 긍정적, 적극적으로 삶의 진보와 발전이 있을 뿐 죽음은 이상의 적으로 알고 우리 힘껏 그것을 정복하려는 결심 아래 자살행위를 평범화한 것, 추한 것, 어리석고 열등한 것으로 여기고 죄악시하는 경향이 있기를 바란다.
결론에 이르러 강 씨와 같이 명민한 두뇌와 미려한 용모와 열정의 가슴이 허무에 돌아간 것을 식자 중 한 사람으로서 애도하며 한 마음을 영전에 드리고자 한다. (6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