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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 보스턴서 만난 베네치아의 봄[이중원의 '건축 오디세이']

입력 | 2020-12-23 03:00:00

〈39〉 美 보스턴 가드너 박물관




베네치아 양식의 가드너 박물관은 편안한 단독주택처럼 지어졌다. 중앙 마당 정원이 박물관의 백미다. 이곳 식물은 박물관에서 30분 떨어진 별도 온실에서 가져온다. 매년 8차례 순회 계절 전시를 한다. 그림 이중원 교수

이중원 성균관대 건축학과 교수

본격적인 겨울이다. 코로나19로 물리적인 추위에 심리적인 추위가 더해졌다. 내일이면 크리스마스이브인데 주변은 그렇지 않다. 이런 시간에 생각해야 할 건축은 무엇일까? 겨울이지만, 봄을 연상하게 하는 건축은 무엇일까? 1903년에 완공한 미국 보스턴 이저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이 그런 가능성을 보여준다.

사람은 계절마다 가고 싶은 곳이 다르다. 봄에 가고 싶은 곳이 있고, 여름에 가고 싶은 곳이 있고, 가을에 가고 싶은 곳이 있다. 겨울에는 추위 때문인지 야외보다 건물 실내가 좋다. 특히 요즘처럼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고 나들이를 못 할 때일수록 꽃이 가득한 온실과 같은 건축이 그립다.

미국 보스턴은 겨울이 길다. 심할 때는 4월에도 90cm의 폭설이 내린다. 첫눈은 낭만으로 시작하지만, 4월의 눈은 지긋지긋하다. 이런 도시에서 잠시 겨울을 잊게 해 주는 건축, 사람을 잠시 봄으로 초대하는 듯한 건축은 각별하다. 몸을 데우고, 마음을 터치한다. 보스턴 가드너 박물관이 그렇다. 건축주의 각별한 사연이 이런 건물을 탄생시켰다.

이저벨라는 어려서 지적이고 아름답고 왈츠를 즐겼다. 그녀는 언변도 뛰어났지만, 자기 말을 앞세우기보다는 남의 말을 경청했다. 열아홉 살이 되던 해 뉴요커였던 그녀는 보스턴 사람 존 가드너와 결혼했다. 보스턴 상류층 여인들은 뉴요커 여자에게 보스턴 훈남을 빼앗겼다고 뒷말이 무성했다.

신혼은 아름다웠지만, 안타깝게도 사랑하는 아들은 두 살 때 죽었다. 이저벨라는 비통함으로 앓아누웠다. 병은 곧 우울증으로 발전했다. 이를 보다 못한 남편은 아내를 데리고 유럽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만난 예술과 건축 덕분에 6개월간 서서히 그녀는 회복했다. 특히 르네상스 미술과 베네치아 건축이 치료제였다. 귀국 후 그녀는 적극적인 예술 전도사로 전향했다.

시련은 다시 찾아왔다. 6년 사이에 아버지와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슬픔에 빠지지 않았고, 아버지와 남편이 남긴 모든 유산을 예술에 쏟기로 결심했고, 박물관을 짓기 시작했다. 이저벨라는 베네치아에 가서 최고의 석공을 영입해 왔을 뿐만 아니라, 건물에 들어가야 할 돌 자재와 유적에서 나온 조각 돌기둥 등을 직접 골라 사왔다. 그러고는 정성스럽게 내정을 가꾸었다.

오늘날 가드너 박물관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한겨울에도 봄과 만난다. 그것도 대서양 건너편에 있는 베네치아의 봄이다. 베네치아 특유의 세 잎 클로버 아치 창틀 아래로 돌계단이 있고, 계단 아래에는 정원이 펼쳐진다. 신선한 꽃들이 잔디와 나무 잎사귀 사이에서 꽃봉오리를 맺는다. 신선한 꽃 냄새가 코끝을 자극하고 천창으로부터 쏟아지는 빛은 핑크색 돌 벽면을 쓸고 내려오고 중정에서 퍼지는 물소리는 중정 아치 회랑 너머로 퍼진다.

마당 중앙의 백색 모자이크 돌바닥 앞에 있는 기둥은 오이지처럼 생긴 기둥과 스크류바처럼 생긴 기둥이고, 마당 회랑의 아치들을 지지하는 기둥들도 생김새가 가지각색이다. 기둥 돌 표면에서 물기가 돈다. 정원에서 퍼지는 물소리와 기둥의 반들반들함이 겨울의 단단함을 녹이고, 마음의 각질을 벗긴다.

천창에서 쏟아지는 빛 입자는 꽃잎에 맺힌 물방울과 돌기둥에 맺힌 물방울에서 반짝인다. 이를 바라보는 이의 건조한 눈도 더불어 촉촉해진다. 그것은 사랑하는 아들과 아버지와 남편을 잃은 이저벨라의 눈물이 시공을 초월해 맞이하는 치유의 촉촉함이다. 그래서 이곳은 물리적인 겨울과 심리적인 겨울이 멈추는 봄의 장소가 되었다.

건축적으로 가드너 박물관은 도심 속에서도 숲이 건축이 될 수 있고, 건축이 숲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인다. 또한 보스턴에서 베네치아를 만나게 하고, 현대의 시간 속에서 근대에 지은 중세의 시간을 목도하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겨울에 봄을 만나게 한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우리 도시에 수많은 가드너 박물관들이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


이중원 성균관대 건축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