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무형문화재 ‘갓일’ 정춘모 장인
투명하면서도 가볍다. 바람은 숭숭 통한다. 넓은 챙은 은근한 곡선으로 휘어져 있고, 둥근 원기둥 모양은 위로갈수록 살짝 좁아진다. 빼어난 맵시다. 한국의 전통사극이 전세계에 방영되면서 의외의 인기를 얻은 아이템이 조선의 선비들이 즐겨썼던 모자인 ‘갓’이다.
“한국은 모자의 왕국이다. 세계 어디서도 이렇게 다양한 모자를 지니고 있는 나라를 본 적이 없다. 공기와 빛이 알맞게 통하고 여러 용도에 따라 제작되는 한국의 모자 패션은 파리인들이 꼭 알아 둘 필요가 있다고 본다.” (시를르 비리, ‘뚜르 드 몽드’, 1892)
조선의 사람들은 왜 모자를 그렇게 많이 썼을까. 가장 큰 이유는 ‘효경’에 나오는 공자의 가르침인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에 따라 남성들도 머리카락을 길러 상투를 틀었기 때문이다. 상투 튼 머리를 가리기 위해 망건을 쓰고, 외출할 때는 갓을 썼다. 신분에 따라 다양한 모자로 상투를 덮었다. 선비들은 흑립(黑笠)을 썼고, 고위층 관료들은 산(山)모양의 단을 덧대 2겹, 3겹의 층을 이루는 정자관(程子冠)을 썼다. 장군들은 가죽으로 만든 전립(戰笠)을, 관례를 치른 소년들은 대나무나 풀을 엮어 만든 초립(草笠), 장돌뱅이 보부상들은 패랭이 모자를 썼다. 왕과 왕세자는 매미날개 모양장식이 달린 익선관(翼善冠)을 썼다.
그런데 이렇게 다양한 전통 모자가 근대에 들어 사라졌다. 그것은 1894년 단발령의 영향이 컸다. 단발령으로 상투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갓 쓰고 오토바이탄다’는 말이 있듯이 상투 없이도 단발에 갓을 쓰고 다니는 사람도 있었지만, 사람들은 점차 서양식 중절모를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라져간 전통 갓이 요즘 다시 대중문화 속에서 부활하고 있다.
● 조선 남성들의 최대의 사치, 갓
“조선의 선비들이 즐겨썼던 갓은 서양은 물론, 중국이나 일본에도 없는 한국의 독특한 모자입니다. 실용성과는 거리가 멀어요. 추위를 막기 위한 것도, 비를 피하게 해주는 용도도 아니죠. 갓은 순전히 인간의 존엄성과 예의, 가치관을 나타내기 위한 상징입니다.”갓은 고려 공민왕 6년인 1357년에 문무백관에게 관모로 제정하면서부터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남이 보지 않는 빈 방안에 혼자 앉아 있을 때도 갓을 벗지 않고 단좌를 했다. 몸가짐을 바르게 갖는 것을 마음 닦는 공부로 삼았던 것이다. 용모를 단정히하고, 옷을 바로입는다는 뜻을 말할 때는 항상 ‘의관(衣冠)’을 정제한다고 말해왔다. 옷에는 옷(衣) 뿐 아니라, 갓(冠)이 꼭 포함돼 있는 법이다.
정춘모 장인은 “갓은 서양에서도, 중국이나 일본과 같은 동양에서도 볼 수 없는 전세계에서 우리나라 밖에 없는 모자”라고 설명했다. 그는 “유교의 인간적인 가치관을 담아 백성들에게 사람답게 사는 데 필요한 예의와 품위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시장에는 그가 갓을 만들 때 쓰이는 각종 도구와 함께 최고의 갓으로 꼽히는 ‘진사립(眞絲笠)’이 벽에 걸려 있다. 진사립은 대우와 양태 위에 명주실을 총총히 늘어 입혀 제작하는 갓으로서, 왕을 비롯하여 신분이 높은 사대부가 착용하는 최상품의 갓이다.
“진사립은 하나 엮으려면 1년이 넘게 걸립니다. 촉살실 수천가닥을 똑같은 간격으로 하나씩 손으로 붙여나가야 해요. 때문에 한 개 완성하고 나면 온 몸에 기력이 빠져나가고, 시력도 망가집니다. 가격은 정해져 있지 않아요. 부르는게 값일 정도예요. 조선시대 남자들의 갓에 대한 사치는 요즘 부인들이 하는 명품 사치는 아무 것도 아니에요. 좋은 갓을 쓰고 싶어하는 생각에 갓을 만드는 기술은 어마어마하게 복잡하고 세련되게 발전했지요.”
갓을 만드는 과정은 3가지로 분류된다. 대나무를 0.1~0.3mm 두께로 잘게 쪼개 만든 실인 죽사(竹絲)로 갓의 둥근 테를 짜는 ‘양태일’, 말총(말꼬리털)으로 원통형 모자 머리를 만드는 ‘총모자일’, 양태와 총모자를 맞추어 갓을 완성시키는 ‘입자일’ 등 크게 3가지 공정을 거친다. 양태일 24과정, 총모자일 17과정, 입자일 10과정 등 총 51개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한 개의 갓이 완성된다. 수백번의 인두질과 어교칠, 먹칠, 옻칠을 반복해야 하는 힘든 과정이다. 요즘엔 갓의 투명한 망사같은 부분을 플라스틱 재료로 만들지만, 전통 갓은 대나무를 잘게 쪼개만든 죽사를 이용해 일일이 손으로 짠 것이니 그 노력과 솜씨가 놀라울 뿐이다.
이처럼 갓을 만들 때는 세가지 과정에 전문가 장인이 분업형태로 일을 한다. 때문에 1964년 정부에서 갓 장인을 인간문화재로 지정할 때 양태장, 총모자장, 입자장 등 세분야 장인을 동시에 지정했다.
●사라져가는 전통갓, 현대적 디자인과 접목
1957년부터 대구에서 갓 만드는 일을 시작한 정춘모 장인은 이후 통영으로 이주해 본격적으로 통영갓의 명맥을 잇는 일에 뛰어들었다. 그는 입자장 보유자인 김봉주 선생의 전수생으로, 총모자장 보유자인 고재구 선생의 전수생으로 배웠다. 또한 거제도의 소문도 선생을 통영으로 모셔 양태를 제작하는 기능까지 익혔다. 그는 세 명이 분업형태로 하던 갓 만드는 일을 모두 익혀 맥이 끊어질 뻔했던 통영갓을 계속 만들어왔다.
“1964년도에 통영갓이 인간문화재로 지정됐을 때 세 분이 전부 70대였어요. 그런데 그 분들에겐 제자가 없었어요. 자식도, 손자도 아무도 배우지 않았지요. 갓일을 배우려면 10~20년 희생해야 하기 때문이예요. 갓 수요도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해 함께 일하던 동료들도 하나둘씩 떠나갔어요. 할 수 없이 홀로 남은 제가 선생님들로부터 모든 기술을 다 익힐 수 밖에 없었죠.”
그의 작업장이 있는 통영12공방은 이순신 장군의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에서 직접 경영했던 공방이었다. 충청, 전라, 경상도의 수군의 지휘권을 가지고 다스리는 통제영 관아에서 필요한 각종 물품을 제작하고 공급하기 위해 설치된 것이 통영12공방. 갓, 부채, 옻칠, 나전칠기, 목가구, 자개, 가죽, 철물 등을 만들어내는 장인들이 전국에서 모여들었던 곳이다. 그 중에서도 통영갓과 나전칠기는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60여년 간 평생 갓을 만들어 온 정춘모 장인의 곁을 지킨 것은 아내였다. 올해로 31년 경력을 맞는 도국희 양태장은 전수자 과정을 끝내고 이수자로 등록된 상태다. 정춘모 장인은 “갓을 나혼자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며 “아내에게 함께 도와달라고 부탁하고, 가르쳤는데 이제는 갓일을 함께 걸어가는 도반(道伴)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1년에 만들 수 있는 갓은 채 10개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부나 지자체에서 1년에 2개 정도의 갓을 구입해주는 것 외에는 판로가 별로 없다. 역사적 고증에 신경쓰는 사극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진짜 갓을 쓰는 경우는 없다. 그는 “사극에서 쓰는 갓은 모두 PVC나 나일론으로 만든 가짜 갓”이라며 “제작비 때문에 이해가 가지만, 진짜 갓을 대여해서라도 찍지 않는 세태가 아쉽고 속상하다”고 말했다.
평생 전통 그대로의 갓을 만들어온 정춘모 장인은 이번 ‘2020 예올 프로젝트 결/겹’ 전시회에서 처음으로 현대적이고 실용적인 공예품과 접목한 작품을 선보였다. 디자이너 조규형, 최정유가 설립한 스튜디오 워드(Studio Word)의 감각적인 디자인으로 재탄생한 갓이다. 전통 갓의 기능과 조형성에 현대의 미감을 접목해서, 일상공간에서 사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조명을 선보였다.
2010년부터 진행된 ‘예올이 뽑은 올해의 장인’ 프로젝트는 아름다운 전통 공예품을 현대인들의 생활에 유용하게 쓰여질 수 있는 물건으로 만들기 위한 공예장인 후원사업이다. 2011년 옹기장 이현배, 2013년 소목장 (故)조석진, 2014년 유기장 김수영, 2015년 화혜장 안해표, 2016년 우산장 윤규상, 2017년 두석장 허대춘·안이환, 2018년 주물장 김종훈, 2019년에는 다회·망수장 임금희 장인과 함께 진행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