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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거물 환전상이 처형된 배경[주성하의 서울과 평양사이]

입력 | 2020-12-24 03:00:00


북한이 코로나19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내년 초부터 수입을 허용하기로 결정했다. 사진은 이달 초 방역작업을 준비하고 있는 북한 노동자들. 노동신문 뉴스1

주성하 기자

김정은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을 이유로 꽁꽁 닫았던 빗장을 마침내 풀 결심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소식통에 따르면 내년 1월부터 방역이 가능한 물자에 한해 수입을 허용한다는 지시가 떨어졌다고 한다. 더는 버티기 어렵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이 지시에 “수출도 못하는데, 무슨 돈으로 수입을 하냐”며 냉소적 반응을 보이는 현장 간부도 많다고 한다. 북-중 무역통계에 따르면 10월 북-중 무역 규모는 166만 달러(약 18억4000만 원)에 그쳤다. 작년 동기 대비 99.4% 줄어든 규모다. 대중 수출액은 10월에 140만 달러(약 15억5000만 원)에 불과했다.

상황이 이런데도 중국 당국은 도와주지 않고 있다. 또 다른 소식통에 따르면 9월 중순 북한에 달러와 위안화를 싣고 들어가던 현금 수송 차량을 중국 정부가 압류했다. 대북제재로 정상적인 금융망을 이용할 수 없는 북한은 올해 4월부터 해외에서 벌어들인 외화를 차로 운반했다. 단둥(丹東)영사관에 외화를 모았다가 어느 정도 쌓이면 평양에 싣고 갔는데, 중국이 대북제재 위반을 핑계로 차량을 뺏은 것이다. 각종 건설공사를 많이 벌여놓았는데 외화는 벌지 못하고, 그나마 몰래 들여가던 외화 수송 통로까지 끊긴 셈이다.

급속히 주머니가 말라가는 김정은은 올해 들어 내부 자금을 털어낼 각종 꼼수를 계속 ‘발명’했다. 대표적인 예가 4월에 무역회사들이 중국에서 밀수해 온 콩기름 등을 방역지침 위반이라며 빼앗은 뒤 가담자들을 엄벌에 처한 조치다. 이후 압수 물자를 평양 시민들에게 팔아 수백만 달러를 챙겼다. 8월엔 북한에서 가장 큰 비리의 온상이던 신의주 세관 검사들을 전원 체포해 그들이 숨겨둔 막대한 비자금을 모두 빼앗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방법만으로는 필요한 자금 확보가 어렵게 되자 다시 새로운 방법을 찾았다. 10월 중순부터 외화를 취급하는 이른바 ‘외화봉사단위’들에 입금을 무조건 북한 화폐로 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코로나 방역을 구실로 올해 북한 당국은 각 무역기관들이 진행하던 수입을 사실상 정부가 독점했다. 들여온 수입 상품은 지방 상업망들에 분배해 팔았다. 북한 주민이 북한 돈보다는 달러와 위안화를 더 많이 쓴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얘기다. 지방 상업망에서도 위안화와 달러를 받고 물건을 팔았다. 그런데 10월 지시로 상품 판매 대금은 외화가 아닌 당국이 정한 환율에 따라 북한 화폐로 내야 한다.

국정 환율은 1위안이 700원으로 정해졌다. 하지만 10월 북한 암시장에서 외화 환율은 1위안이 약 1200원, 1달러가 약 8200원이다. 이전까진 당국이 1200원에 팔라며 준 상품을 팔면 암시장 환율에 기초해 1위안을 직접 당국에 내면 됐다. 하지만 이제는 1위안을 은행에 가서 바꾸어 북한 돈으로 내야 하는데, 은행에선 700원만 준다. 1200원을 바치려면 1.7위안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결과적으로 졸지에 상납금이 1.7배나 오른 셈이다.

이를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상업기관들은 국영은행에서만 돈을 바꾸라는 지시를 어기고 몰래 암시장을 찾았다. 은행에 가면 1위안을 북한 돈 700원으로 쳐주지만 환전상은 1200원으로 바꿔주기 때문이다. 북한 당국이 이를 묵과할 리가 없다. 결국 평양의 거물 환전상이 본보기로 처형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후 상업기관들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물건 가격을 올릴 수밖에 없게 됐다. 10월까지 1200원에 팔던 상품을 지금은 2000원 이상으로 인상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국경 폐쇄로 수입을 제대로 못하는 데다 당국까지 수입을 독점한 뒤 환율로 장난을 치자 김정은 집권 이후 그런대로 유지되던 시장은 급속히 망가지고 있다. 당국의 강력한 북한 돈 사용 정책 및 암시장 단속 때문에 요즘 암시장 외화 환율은 1위안이 1200원에서 800원대로, 1달러가 8200원에서 6000원대로 떨어졌다. 여기에 국경 봉쇄까지 겹쳐 200원짜리 가스라이터가 2000원으로 상승하는 등 대다수 공업품 가격은 올 초에 비해 10배가량 상승했다. 이로 인해 죽어나는 것은 결국 주민들뿐이다.

요즘 북한 사람들은 살기 위해 식량은 어쩔 수 없이 구매하지만 공업품은 거의 사지 않는다. 결국 김정은의 말라가는 외화주머니가 시장 파탄과 민생경제 파탄으로 전이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이 내년에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주의 깊게 관찰할 필요가 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