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인 관광객이 연기처럼 사라졌습니다.”
23일 세계적 스키 휴양지인 스위스 남서부 베르비에의 한 리조트. 직원들은 하루 전 이 곳에 집단 투숙한 영국인 관광객이 단체로 전화를 받지 않자 객실을 찾았다가 깜짝 놀랐다. 변이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당국의 격리 지시를 받았던 영국인 420명 중 200여 명이 감쪽같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각 방에는 룸서비스로 배달된 음식조차 손을 대지 않은 채 놓여 있을 정도로 야반도주 흔적이 가득했다.
가디언 등에 따르면 21일 스위스 보건부는 이달 14일 이후 영국에서 온 입국자에게 10일간 자가 격리 명령을 내렸다. 기존 바이러스보다 전염력이 70% 이상 강한 변이 바이러스가 영국에서 발견되자 긴급 방역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결과였다. 이 조치는 베르비에의 리조트에 머물던 영국인 관광객에게도 적용됐다. 이들은 20㎡(약 6평)의 호텔방에 4명씩 모여 10일간 격리돼야 한다는 지침을 전달받았다.
이 여파로 전 유럽이 발칵 뒤집혔다. 세계 각국이 영국발 변이 바이러스를 차단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데도 영국인 관광객이 선진국 시민에 걸맞지 않은 무책임한 행동을 했다는 질타가 쏟아지고 있다.
다만 일각에서는 무작정 관광객들만 비난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해당 리조트의 한 직원은 스카이뉴스에 “좁은 호텔방에 4명이 10일간 격리돼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관광객이 스위스 정부에 화가 난 것도 방역에 영향을 미쳤다”고 밝혔다. 현지에서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확진자로 의심받는 등 영국인 관광객에 대한 외국인 혐오 정서 또한 이들의 단체 탈출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스위스 정부는 올해 4월 코로나19 방역을 위해 폐쇄한 국경을 넘는 사람들에게 100스위스프랑(약 12만 원)의 벌금을 부과하겠다고 경고했다. 영국 정부 또한 9월 당국으로부터 감염자 접촉 통보를 받은 이들이 자가 격리 규정을 위반하면 처음에는 1000파운드(약 150만원), 반복적으로 위반하면 최대 1만 파운드(약 1500만 원)의 벌금을 물리기로 했다. 이에 따라 도주한 영국인들이 귀국하면 양국 정부로부터 상당한 벌금을 부과받을 가능성 또한 제기된다.
최근 유럽 내에서는 스키장 개장 및 관리 문제를 두고 상당한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달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유럽연합(EU) 전체의 스키장을 폐쇄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스키 관광 수입이 높은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이 거세게 반발해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파리=김윤종 특파원zozo@donga.com
임보미기자 bo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