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227명 트럼프 판사’는 트럼프 판사가 아니다”[정미경 기자의 청와대와 백악관 사이]

입력 | 2020-12-29 14:00:00

자신이 임명한 판사들로부터 연패 수모




영어의 어원을 찾아가다보면 법에서 유래한 용어들이 많습니다. 수많은 ‘미드’에서 보듯이 미국인들은 워낙 법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도널드 트럼프 시대에 미 사법 체계는 큰 변화를 겪었습니다. 요즘 트럼프 대통령은 유죄 판결을 받은 자신의 측근들 사면시키느라고 정신이 없죠. 얼마 전까지는 판사 교체에 전력을 쏟았습니다. 미국변호사협회(ABA)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임기 4년 동안 연방법원 판사 227명을 교체했습니다. 대법관 9명 중 3명, 항소법원 판사 179명 중 53명, 지방법원 판사 677명중 174명을 교체했죠. 대법원과 항소법원은 전체의 3분의 1, 지방법원은 4분의 1 수준입니다.


최고 기록은 아닙니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임기 4년 동안 이보다 더 많은 260명을 갈아치웠죠. 문제는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성향으로 판사들을 채워 넣다보니 수가 부족하고, 그래서 ‘수준 미달자’가 포함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트럼프 임명 판사 중 10명이 ABA의 ‘자격미달(unqualified)’ 도장을 받았습니다. 물론 ABA가 자격미달 판단을 내린다고 해서 임명에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수치스러운 일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트럼프 정권의 판사 교체 열풍을 보면서 법조계와 언론을 중심으로 일찌감치 ‘대선 법적 다툼’ 우려가 터져 나왔습니다. 트럼프 진영이 오래 전부터 불복 소송을 계획하면서 이에 대비해 법원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만들려고 한다는 것이었죠.

결과는 어떨까요. 트럼프 진영은 지금까지 53건의 대선 관련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모두 패하거나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상당수는 자신이 임명한 판사로부터 얻은 결과였죠. 일부는 트럼프 진영이 알아서 소송을 취하했고, 다른 일부는 증거자료 미비로 재판 시작도하기 전에 퇴짜를 맞았습니다. 어떤 사건은 트럼프 변호인들이 판사에게 질책을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습니다.


가장 먼저 나온 판결부터 보자면 펜실베이니아 주 제3순회항소법원(항소법원은 13개의 순회구역으로 나뉨)의 스테파노스 비바스 판사는 “선거가 불공정했다는 트럼프 변호인 측 주장은 매우 심각한 것이다. 그러나 불공정하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선거가 불공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 같은 주장을 하려면 구체적인 혐의와 증거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혐의도 없고 증거도 없다”고 판결했습니다. 비바스 판사는 트럼프 대통령이 2017년 임명했죠.

조지아 주 사건도 유명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해 임명한 스티브 그림버그 연방지법판사는 트럼프 지지자로 유명한 린 우드 변호사가 제기한 투표결과 인증 중단 청원을 거부하면서 “마지막 순간에 제기하는 중단 요구는 혼란과 선거권 박탈 의심을 초래할 수 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법적으로나 사실적으로나 근거가 없다”고 밝혔습니다.


가장 굴욕적인 사건으로는 위스콘신 판결이 꼽힙니다. 브렛 루드비히 연방지법 판사는 트럼프 진영의 우편투표 절차 무효 소송에 대해 “어떻게 이런 소송을 연방법원까지 가지고 올 수 있는지 이해하는 데 매우 매우 힘든 시간을 가졌다. 거의 기이하다”고 판결했습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이 올해 임명한 판사였죠.

이런 판결들이 연이어 나오는 데 대해 “애초에 소송 가치조차 없는 유치한 사건들”이라는 지적이 나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소송을 벌이는 이유가 법적인 정당성 확보가 아니라 지지자 결집을 위한 모양새를 갖추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볼 때 수보다는 양이 중요하니까요.

“‘트럼프 판사’는 트럼프 판사가 아니다(‘Trump judges’ are not Trump judges).” 요즘 미국에서 유행하는 말입니다. “‘트럼프가 임명한 법관’이라고 해서 트럼프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리는 법관이 아니다”라는 뜻이겠죠.


2018년 트럼프 대통령이 사법부 판결을 트집 잡으며 “오바마 판사”라는 용어를 쓰자 존 로버츠 대법원장이 “우리에겐 ‘오바마 판사’나 ‘트럼프 판사’ ‘부시 판사’ ‘클린턴 판사’가 없다”고 반박한데서 유래한 말입니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법을 공부하고 법에 대해 치열하게 연구하며 살아온 법관의 세계를 모독하고 모든 것을 거래로 재단하는 트럼프식 사고방식에 일침을 놓은 것이죠. 당시만 해도 “순진한 발언”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듣기도 했지만 지금은 “이해가 된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네요. 대선 소송전은 역설적으로 미국인들에게 법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하는 계기가 된 것이죠.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