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시티 분양 사업을 하며 횡령·배임 범죄를 저지른 혐의 등으로 2003년 구속된 윤창열 씨. 동아일보 DB
눈 내리는 동부구치소 ‘살려주세요’ 자필 종이. 뉴시스
굿모닝시티 분양 사업을 하며 횡령·배임 범죄를 저지른 혐의 등으로 2003년 구속된 윤창열 씨. 동아일보 DB
하지만 이후 행보는 순탄치 않았다. 모든 사업계획이 서울 중구 을지로 6가 일대 4300㎡(약 1300평) 부지에 첨단 시설을 갖춘 대형 패션 테마상가인 '굿모닝시티' 성공이 전제였다. 당시 동대문 패션 상권은 밀리오레, 두산타워 등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면서 우리나라 도·소매 유통의 핵심거점으로 입지를 굳히던 때였다.
2003년 10월 13일 굿모닝시티 분양사기관련 윤창열회장의 6차공판이 열린 서초동 검찰청사앞에 사기 피해자들이 부패없는 사회 구현 촉구 대회를 열고 있다. 동아일보 DB
굿모닝시티 분양사기 피해자로 구성된 굿모닝시티계약자협의회 회원들이 2004년 7월 6일 상가 건축현장인 옛 계림빌딩에서 법정관리 정상화를 요구하는 기자회견과 집회를 열고 있다. 이 협의회는 검사장 출신 유력인사가 윤창열회장으로부터 수사무마 청탁금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동아일보 DB
사기사건의 장본인이 되기 전까지 그는 배고픔을 잊기 위해 13세라는 어린나이에 목수일을 시작해 대형 부동산개발업체 회장으로 ‘변신’한 인물로 재계에서 주목을 받았다. 그는 중·고등학교를 검정고시로 마치고 29세 늦깎이로 연세대 중문과에 합격했다. 생전 동아일보와 인터뷰에서 그는 “중학교 입학시험에서 180명 가운데 3등을 했다. 그런데 등록금이 없었다. (그래서) 전북 익산에서 무작정 상경했다. 그때 목공일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이후 악착같이 일하면서 돈을 모든 뒤 16세 때 직접 목공소를 차리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남의 밑에서 일하기를 13년. 어느 정도 모은 돈으로 독서실, 하천 복개공사를 하는 개발 회사 등을 차렸지만 하는 사업마다 번번이 실패를 거듭했다. 삶이 힘들어 3번이나 자살을 시도하는 등 시련이 끊이질 않았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시련이 그를 강철보다 더 단단한 인간으로 만들었다고 회고했다. “사는 것도 어려운데 죽는 것은 더 힘들었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황재성 기자 jsonhng@donga.com
이태훈 기자 jeff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