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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복 시대 연 ‘패션의 제왕’ 지다

입력 | 2020-12-30 03:00:00

디자이너 피에르 카르댕 별세
고급 맞춤복 유행시절에 패션혁명
화려한 색상-대담한 무늬 사용
재클린-테일러-바르도 즐겨입어
“내가 만들기 전엔 디자이너들… 남성을 위한 옷 만들지 않아”



세계적 패션 디자이너로 ‘기성복의 제왕’인 피에르 카르댕이 29일(현지 시간) 별세했다. 그가 2008년 10월 프랑스 남부 테울쉬르메르에서 자신의 옷을 입은 모델들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카르댕은 1959년 최초로 일반 대중을 위한 기성복을 출시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테울쉬르메르=AP 뉴시스


이탈리아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활동한 세계적 패션 디자이너 피에르 카르댕이 29일(현지 시간) 별세했다. 향년 98세. 카르댕은 프랑스 파리의 한 병원에서 눈을 감았는데 정확한 사망 원인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고 AFP통신 등이 보도했다.

‘기성복의 제왕’으로 불리는 카르댕은 소수의 부유한 개인 고객을 위한 맞춤형 고급 패션 ‘오트 쿠튀르(Haute Couture)’가 주류를 이루던 세계 패션계에 일반 대중을 위한 기성복 ‘프레타포르테(pr^et-‘a-porter)’를 도입해 패션의 역사를 새로 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부인 재클린 여사, 미국 여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리타 헤이워스, 프랑스 여배우 브리지트 바르도 등 세계적인 명사들이 그의 옷을 즐겨 입었다. 세계적인 록밴드 ‘비틀스’가 공연 때 입었던 칼라리스(collarless) 재킷도 카르댕이 디자인한 옷이다.

카르댕은 1922년 이탈리아 베네치아 인근 트레비소에서 태어났다. 가족은 파시스트 독재를 피해 그가 두 살 때 프랑스로 이주했다. 와인을 파는 부유한 상인이었던 아버지는 아들이 건축을 전공하길 원했지만 카르댕은 어려서부터 옷 만들기에 관심이 많았다. 14세부터 양복점 수습생으로 일했고 28세 때인 1950년에 자신의 이름을 붙인 패션 하우스를 설립했다.

카르댕은 1959년 유명 디자이너 중 최초로 일반 대중을 위한 기성복 제품을 출시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급 맞춤복만 취급하던 파리의 한 백화점에 그가 기성복을 납품하자 발끈한 파리 의상협동조합은 카르댕을 쫓아냈다. 그는 생전 인터뷰에서 “많은 사람들이 프레타포르테가 날 죽일 것으로 봤지만 사실은 나를 살렸다”고 회고했다. 남성복을 제작한 최초의 디자이너인 그는 2009년 AFP통신에 “내가 만들기 전에는 재단사를 제외하고 그 어떤 디자이너도 남성을 위한 옷을 만들지 않았다”고 밝혔다. 카르댕은 평범한 직물이 아닌 비닐, 금속, 섬유 등을 이용한 전위적인 옷을 만들어 ‘우주시대 디자이너’로도 불렸다. 화려한 색상과 대담한 무늬를 즐겨 사용했고 여성의 뒤태를 강조하기 위해 옷의 엉덩이 부분을 과도하게 부풀린 ‘버블 드레스’ 역시 유명하다.

르몽드에 따르면 카르댕은 인도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피델 카스트로 전 쿠바 국가평의회의장 등 세계 각국 지도자와도 돈독한 교분을 유지했다. 이런 유명 정치인들과 찍은 사진을 자신의 사무실에 진열해 놓기도 했다.

카르댕은 2012년 7월 90세의 나이에도 작품 발표회를 갖는 등 노년까지 활발한 활동을 하며 패션 산업을 주도했다. 당시 인터뷰에서 그는 “이 일을 시작할 때는 내가 가장 어렸고 지금은 가장 나이가 많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일하고 있다”며 자신은 영원한 현역이라고 강조했다.

카르댕은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 영화 ‘400번의 구타’ 등에서 주연을 맡았던 프랑스 유명 여배우 잔 모로(1928∼2017)는 카르댕의 작품세계에 큰 영향을 준 사람으로 꼽힌다. 장뤼크 고다르, 프랑수아 트뤼포 등 프랑스 작가주의 실험영화에 자주 출연한 그는 카르댕과 평생 친분을 유지했다.

신아형 기자 abro@donga.com / 파리=김윤종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