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야구팬이 힘 모아 찾아낸 진짜 ‘2군 본즈’, ‘2군 페드로’ [베이스볼 비키니]

입력 | 2020-12-30 11:09:00


김승관(44)이 아니라 조평호(35)가 한국의 마이크 헤스먼(42)이었습니다.

헤스먼은 프로야구 무대에서 20년 동안 뛰면서 홈런을 총 462개 날렸습니다. 그리고 이 중 433개를 미국 마이너리그 경기에서 남겼습니다. 마이너리그 역사상 그 어떤 선수도 헤스먼보다 홈런을 많이 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배리 본즈(56)가 메이저리그 역대 최다 홈런 기록 주인공인 것처럼 헤스먼이 마이너리그 최다 홈런 기록 주인공입니다.

도핑(약물을 써서 경기력을 끌어올리는 행위) 때문에 빛이 바래기는 했지만 현역 시절 본즈는 ‘타격의 신’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1군에만 올라오면 침묵하지만 퓨처스리그(2군)에서는 뻥뻥 잘 치는 타자에게 ‘2군 본즈’라는 별명이 붙었을 겁니다.

이달 28일까지만 해도 우리는 진짜 2군 본즈가 누구인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한국야구위원회(KBO)에서 2군 통산 기록을 정리해 공개한 자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29일부터는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깊이 있는 야구 콘텐츠’를 나누고자 하는 팬들이 만든 모임 ‘야구공작소’는 본격적으로 2군 리그가 막을 올린 1990년부터 올해까지 2군 기록을 정리해 이날 공개했습니다. (2군 전체 기록은 다음 링크에서 내려 받을 수 있습니다. https://bit.ly/3rAW1vP)

1군에서 통산 타율 0.233, 4홈런, 16타점을 기록한 조평호. 동아일보DB



이 자료에 따르면 현대 - 넥센 - NC에서 활약한 조평호는 2군 경기에 총 791번 출전해 118홈런을 날렸습니다. 프로야구 역사상 2군 경기에서 가장 홈런을 많이 친 타자가 바로 조평호입니다. 조평호는 또 타점(551점)과 최다안타(764개)에서도 2군 기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단, 2군 최다 홈런 기록은 내년에 깨질지 모릅니다. KT 문상철(29)이 412경기, 1795타석 만에 109홈런을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조평호에게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문상철이 플레이오프 엔트리에도 이름을 올리는 등 점점 1군 무대에서도 통하는 선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재 팬’ 가운데는 김승관을 2군 본즈로 기억하시는 분이 적지 않으실 겁니다. 김승관은 고교 시절 나중에 한국 대표 홈런 타자가 되는 이승엽(44)과 함께 ‘좌승엽 우승관’으로 불렸던 유망주 출신. 1군 무대에서는 삼성과 롯데 유니폼을 입고 13년 동안 통산 타율 0.214, 3홈런, 33타점이 전부였지만 2군 경기에서는타율 0.306, 93홈런(5위), 426타점(공동 3위)을 남겼습니다. 통산 OPS(출루율+장타력)은 0.938.

누적 기록은 다르지만 비율 기록 상위권에는 1군 무대에서 이름을 알린 선수가 여럿 포진하고 있습니다. 2군 경기에 1000타석 들어선 선수 가운데 통산 OPS가 가장 높은 선수는 ‘작은’ 이병규(37·롯데)로 1120타석에서 1.085를 기록했습니다. 2위는 박병호(34·키움)로 1177타석 1.014입니다. 이어서 전준우(34·롯데)가 1130타석에서 정확하게 1.000을 남겼습니다.

1군 통산 3승 7패 평균자책점 7.15를 남긴 장진용. 동아일보DB



투수 부문 쪽 기록을 보면 2군 통산 최다승 투수는 전 LG 장진용(34)으로 67승(23패)을 기록했습니다. 장진용을 제외하면 2군 무대에서 통산 50승을 기록한 선수도 없습니다. 대신 김상수(32·키움)와 김기태(33·전 삼성)가 각각 49승을 거뒀습니다.

2군 경기 통산 최다 세이브 기록은 이정훈(43·전 넥센)이 보유하고 있습니다. 총 50세이브니까 1군 경기에서는 사실 한 시즌에도 남길 수 있는 기록입니다. 2군 최다 홀드 주인공은 김건한(39·전 KIA)으로 통산 17홀드를 기록했습니다.

투수 쪽도 비율 기록은 1군 경기에서도 이름을 남긴 선수들 차지입니다. 2군에서 통산 100이닝 이상 던진 투수 가운데는 김현욱(50·전 삼성)이 167이닝을 평균자책점 1.99로 막으면서 이 부문 통산 1위에 이름을 올렸고, 2군 경기에서 205이닝을 던진 이대은(31·KT)이 10.9개로 9이닝당 탈삼진이 가장 많은 투수였습니다.

영화 ‘19번째 남자’ 스틸 컷. 오리온 픽처스 제공



노스캐롤라이나주(NC)에 자리잡은 마이너리그 팀 ‘더럼 불스’는 이제 많은 프로야구 팬들에게 ‘아, NC와 사이 좋은 그 팀’이 됐지만 원래는 야구 영화 ‘19번째 남자(Bull Durham)’에 등장하는 팀으로 유명했습니다.

이 영화 주인공은 마이너리그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포수 크래시(케빈 코스트너 분). 만년 하위팀인 더럼 불즈에서 그를 영입한 이유는 오직 ‘영건’ 에비(팀 로빈스 분)의 메이저리그 연착륙을 돕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크래시 역시 가슴에 꼭 이루고 싶은 꿈 하나를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마이너리그 최다 홈런 기록 주인공이 되는 것. 에비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하자 더럼 불스에서 방출당한 크래시는 이 꿈을 찾아 애니(수전 서랜든 분)의 사랑도 뿌리치고 새로운 팀을 찾아 떠납니다. 크래시는 결국 마이너리그에서 247번째 홈런을 기록하지만 이 사실을 보도한 신문은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어느 쪽이 더 행복한 인생일까요? 메이저리그에서 그저 그런 백업 선수로 버티는 것과 마이너리그에서 아무도 모르는 역대 최다 홈런왕이 되는 것. 인정하기 싫지만 우리 대부분이 그렇게 ‘2류’로 늙어간다는 게 인생의 슬픈 진실일 겁니다. 게다가 인생은 운칠기삼. 이 영화 대사처럼 누군가 평생을 마이너리그에서 보낼 때 다른 누군가는 일주일에 하나씩 터진 바가지 안타 덕분에 양키스타디움에 섭니다.

그래서 여쭤봅니다. 여러분이 가슴에 품고 있는 247번째, 아니 118번째 홈런은 무엇인가요?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 모두 새해에는 그 홈런에 한 걸음 더 다가가시를 기원합니다.

야구공작소 관계자 여러분도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