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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자산 관리 갈피 못잡는 인천의 ‘초라한 자화상’

입력 | 2020-12-31 03:00:00

추사 이후 최고 명필가 유희강 선생, 수장고 부족해 유작 타 지역 옮겨
‘120서체’로 유명한 전정우 서예가, 작품기증 협상 과정서 고향 떠나
인천시는 기증 작품 수집 본격화




120서체를 탄생시킨 전정우 서예가는 강화군과의 작품 기증 협상이 결렬되자 20년간 가꾼 강화도 심은미술관 운영을 포기하고 최근 고향 강화도를 떠났다. 심은미술관 제공

인천 지역 예술인들은 ‘인천이 근대미술의 근원지입니다’라는 글을 새긴 배지를 달고 다닌다. 인천이 국내 최초의 서양화가 춘곡 고희동, 조선 마지막 왕인 순종의 어진을 그린 이당 김은호, 국내 최초의 미술사학자 우현 고유섭, 국내 최초의 미술평론가 이경성 등 근대미술 대가들을 배출한 고장이라는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다. 추사 김정희 이후 최고 명필가로 손꼽히는 인천 출신 검여 유희강 선생의 유작 1000여 점을 기증받을 수 있었음에도 수장고 시설 부족으로 2018년 5월 성균관대박물관으로 옮겨지면서 이런 자부심을 무색하게 했다. 이후 인천시가 지역 문화자산 수집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있으나 미술작품 기증을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 고향 홀대로 기증 포기한 서예가

20년간 인천 강화군 하점면 이강리의 옛 강후초등학교 폐교를 심은미술관으로 운영해 오던 서예가 전정우 씨(73)는 최근 이곳에 전시 보관해 오던 자신의 작품 3000여 점을 다른 곳으로 옮겨 놓고 고향 강화도를 떠났다. 그는 강화군과 1년 넘게 진행하던 작품 기증 협상 과정에서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

1980년대 동아일보 주최 동아미술제 미술상, 대한민국 미술대전(국전) 대상을 받았던 전 씨는 상형문자, 고대 글씨체, 한석봉 김정희 같은 명필가 필체 등 120종의 서체로 천자문을 쓴 ‘120서체’로 유명한 서예가다. 자신의 호를 딴 ‘심은서체’를 탄생시켰고 한글 및 한문 혼용 서예와 서첩, 문자 추상회화 등 다양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이들 작품과 글자 형상 조형물, 도예, 조각, 회화작품을 소장한 심은미술관이 강화도 명소로 자리 잡으면서 국비 지원을 통한 폐교시설 활용 문화재생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인천시와 강화군은 국비와 지방비 등 40억 원을 투입해 심은미술관을 개·보수한 뒤 내년 말까지 천자문문화관을 설립하고 북카페, 캠핑장, 전시장을 갖춘 복합문화공간으로 단장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인천시가 폐교 건물과 땅을 먼저 사들인 뒤 강화군에 넘기기로 했으나 전 씨 작품의 소장 방식을 둘러싼 이견으로 개·보수 공사가 차질을 빚고 있다. 전 씨는 대학 총장, 전 서울시립미술관장 등 5명을 협상대표로 내세워 협의를 했으나 지난달 말 강화군으로부터 협상 결렬을 최종 통보받았다.

협상대표들은 “강화군이 예술가의 독자적인 자율성과 작가 재량권을 위배하는 입장을 보였다”며 강화군수에게 입장문을 전달했다. 이들은 “120서체 천자문 1종을 기증하고 3종을 영구 무상 임대해 주기로 한 초기 합의를 무시하고 4종 모두를 무상 기증하라고 하는 등 강화군이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심은천자문서예관’이라는 이름과 달리 작품 전시 공간도 제대로 마련해 주지 않고, 작가 생존 때까지만 서예관을 운영하겠다는 터무니없는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강화군 관계자는 “폐교 재생공간에 전 씨의 전시 공간을 만들어 주기로 한 만큼 소장 가치가 높은 120서체 작품을 무상 기증받는 것은 당연하다. 협상이 결렬돼 서예관을 뺀 복합문화공간 재생 사업을 내년 말까지 완료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 미술품 기증 북돋우는 풍토 조성해야

인천시는 지역 문화자산의 타 지역 유출을 막으면서 2025년경 미추홀구 뮤지엄파크 내에 문을 열 시립미술관에 전시할 작품을 확보하기 위한 예산을 우여곡절 끝에 최근 마련했다. 그러나 작품을 기증할 작가 및 기증 작품 선정, 예산 확보를 둘러싸고 진통을 겪었다.

올 6월 시립미술관 작품 수집 및 관리 규정을 제정한 이후 미술작품수집심의위원회, 작품가치평가위원회를 열었으나 시의 작품 수집 방침이 부결되기도 했다. 최근 시립미술관추진위원회 심의를 거쳐 인천 출신 국전 작가 2명 중 생존해 있는 고정수 조각가(73)의 작품 40점을 기증받기로 결정했다. 당초 고 작가로부터 100점을 기증한다는 뜻을 전달받았으나 심의를 통해 40점만 받기로 했다. 고 작가는 1981년 ‘자매Ⅱ’라는 조각품으로 국전 대상을 받는 등 유명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시는 40점을 기증받으면서 작품 평가액과는 상당히 차이가 나는 1억여 원을 포상금으로 지급할 것으로 알려졌다. 국립현대미술관 등은 작품을 기증받더라도 통상 평가액의 10∼20%까지 포상금을 주고 있다.

시는 앞으로 작품 기증이 원활한 문화를 조성하기 위한 예산을 매년 편성하는 한편 시립미술관 개관 이전까지 영종도 물류단지 내에 항온·항습 시설을 갖춘 창고를 임시 수장고로 운영하기로 했다. 차기율 인천대 예술체육대 학장은 “인천에서 처음으로 공공기관이 작품 수집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해 의미가 크다”며 “작품 기증에 대한 규정과 예산 규모를 체계적으로 마련할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그동안 인천에서는 지역 문화자산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외지로 유출하는 사례가 끊이지 않았다. 검여 선생의 작품 외에도 동정 박세림 선생의 서예작품이 대전대박물관으로 이전됐고, 작곡가 김점도 선생의 소장품이었던 가요책자 2000여 권과 레코드판 2만여 점이 경기 용인시 신나라레코드가요연구소로 기증됐다.

박희제 기자 min0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