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이후 최고 명필가 유희강 선생, 수장고 부족해 유작 타 지역 옮겨 ‘120서체’로 유명한 전정우 서예가, 작품기증 협상 과정서 고향 떠나 인천시는 기증 작품 수집 본격화
120서체를 탄생시킨 전정우 서예가는 강화군과의 작품 기증 협상이 결렬되자 20년간 가꾼 강화도 심은미술관 운영을 포기하고 최근 고향 강화도를 떠났다. 심은미술관 제공
○ 고향 홀대로 기증 포기한 서예가
20년간 인천 강화군 하점면 이강리의 옛 강후초등학교 폐교를 심은미술관으로 운영해 오던 서예가 전정우 씨(73)는 최근 이곳에 전시 보관해 오던 자신의 작품 3000여 점을 다른 곳으로 옮겨 놓고 고향 강화도를 떠났다. 그는 강화군과 1년 넘게 진행하던 작품 기증 협상 과정에서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
1980년대 동아일보 주최 동아미술제 미술상, 대한민국 미술대전(국전) 대상을 받았던 전 씨는 상형문자, 고대 글씨체, 한석봉 김정희 같은 명필가 필체 등 120종의 서체로 천자문을 쓴 ‘120서체’로 유명한 서예가다. 자신의 호를 딴 ‘심은서체’를 탄생시켰고 한글 및 한문 혼용 서예와 서첩, 문자 추상회화 등 다양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인천시와 강화군은 국비와 지방비 등 40억 원을 투입해 심은미술관을 개·보수한 뒤 내년 말까지 천자문문화관을 설립하고 북카페, 캠핑장, 전시장을 갖춘 복합문화공간으로 단장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인천시가 폐교 건물과 땅을 먼저 사들인 뒤 강화군에 넘기기로 했으나 전 씨 작품의 소장 방식을 둘러싼 이견으로 개·보수 공사가 차질을 빚고 있다. 전 씨는 대학 총장, 전 서울시립미술관장 등 5명을 협상대표로 내세워 협의를 했으나 지난달 말 강화군으로부터 협상 결렬을 최종 통보받았다.
협상대표들은 “강화군이 예술가의 독자적인 자율성과 작가 재량권을 위배하는 입장을 보였다”며 강화군수에게 입장문을 전달했다. 이들은 “120서체 천자문 1종을 기증하고 3종을 영구 무상 임대해 주기로 한 초기 합의를 무시하고 4종 모두를 무상 기증하라고 하는 등 강화군이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심은천자문서예관’이라는 이름과 달리 작품 전시 공간도 제대로 마련해 주지 않고, 작가 생존 때까지만 서예관을 운영하겠다는 터무니없는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강화군 관계자는 “폐교 재생공간에 전 씨의 전시 공간을 만들어 주기로 한 만큼 소장 가치가 높은 120서체 작품을 무상 기증받는 것은 당연하다. 협상이 결렬돼 서예관을 뺀 복합문화공간 재생 사업을 내년 말까지 완료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 미술품 기증 북돋우는 풍토 조성해야
인천시는 지역 문화자산의 타 지역 유출을 막으면서 2025년경 미추홀구 뮤지엄파크 내에 문을 열 시립미술관에 전시할 작품을 확보하기 위한 예산을 우여곡절 끝에 최근 마련했다. 그러나 작품을 기증할 작가 및 기증 작품 선정, 예산 확보를 둘러싸고 진통을 겪었다.
시는 앞으로 작품 기증이 원활한 문화를 조성하기 위한 예산을 매년 편성하는 한편 시립미술관 개관 이전까지 영종도 물류단지 내에 항온·항습 시설을 갖춘 창고를 임시 수장고로 운영하기로 했다. 차기율 인천대 예술체육대 학장은 “인천에서 처음으로 공공기관이 작품 수집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해 의미가 크다”며 “작품 기증에 대한 규정과 예산 규모를 체계적으로 마련할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그동안 인천에서는 지역 문화자산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외지로 유출하는 사례가 끊이지 않았다. 검여 선생의 작품 외에도 동정 박세림 선생의 서예작품이 대전대박물관으로 이전됐고, 작곡가 김점도 선생의 소장품이었던 가요책자 2000여 권과 레코드판 2만여 점이 경기 용인시 신나라레코드가요연구소로 기증됐다.
박희제 기자 min0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