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만 장의 음반을 클릭 한두 번에, 그것도 공짜로 들어볼 수 있는 시대에도 판 욕심은 잦아들지 않는다. 오히려 더 부풀어오르는 듯…. 만화 ‘레코스케’에서 주인공이 음반을 더 이상 사지않기로 결심한 뒤 큰 절망에 빠진 장면. 안나푸르나 제공
임희윤 기자
‘레코스케’의 주인공은 레코드판에 미친 레코스케 군이다. 그의 친구 ‘레코조우’ 군도 만만찮다. 나중에 등장하는 ‘비틀님’은 말 그대로 비틀스 수집가인데 ‘병세’가 심상찮다.
비틀님은 길을 걷다 나뭇가지에 앉은 새를 발견하면 그 즉시 6개의 비틀스 노래를 떠올린다. 깃털이 감색이니 ‘Bluebird’와 ‘Blackbird’의 중간쯤이리라 먼저 추정. 굳이 돌을 던져 푸드덕거리게 한 뒤 날개 소리를 감청해 ‘Free as a Bird’보다 ‘Across the Universe’의 새에 더 가깝다고 진단한다. 지저귀자 ‘And Your Bird Can Sing’을, 날아가 버리자 ‘Norwegian Wood(This Bird Has Flown)’을 떠올린다.
“하마터면 (영국 밴드) ‘베이 시티 롤러스’에 받혀 죽을 뻔했네. 조지 판에 받혀 죽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
레코스케의 최종 조치는 조지의 판 중에서도 가장 무거운 박스세트, ‘All Things Must Pass’와 ‘The Concert for Bangladesh’를 맞으면 즉사할 위치에 배치한 것….
#2. 어떤 L자들은 정말 죽기 살기로 모은다. 판을 판다(digging)는 말에 걸맞은, 재빠른 너구리 손이 울버린처럼 음반점에만 가면 돋아난다. 표지를 0.5초 만에 스캔해 내는 매의 눈도 겸비한 이 시대의 진짜 키메라(chimera)들이다. 이 괴상하거나 고상한 열병은 판을 파는(selling) 사람들도 앓고 있다. 제작 과정에서 인쇄가 잘못된 샘플 음반을 악착같이 모아두고, 다른 제작사에서 나온 한정반을 구하기 위해 인맥을 가동한다.
#3. 2020년 국내 음반 판매량이 4000만 장을 돌파했다. 21세기 들어 연간 최대치로 추정된다. 국내에는 안타깝게도 LP만 집계하는 공식 통계가 없지만 이 시장은 더 큰 성장세를 보였을 거라는 게 업계의 추산.
#4. 몇 년 전부터 분 LP 붐이 정착하고 더 폭발하게 된 데는 턴테이블 제작사의 발 빠른 움직임도 한몫했다. 김윤중 도프레코드 대표는 “거의 모든 턴테이블 제작사에서 편리성과 품질을 함께 갖춘 새 모델을 앞다퉈 쏟아냈다. 코로나19만 아니었다면 미국에서는 2020년 대규모 턴테이블 박람회가 열렸을 것”이라고 말한다. 호기심에 몇 년 전부터 한두 장씩 LP를 사둔 MZ세대가 마침내 턴테이블을 장만하고 수집에 가속 페달을 밟았을 거라는 게 그의 이야기다.
#5. 업계에 따르면 전 세계에 LP 공장은 70여 곳 존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LP 붐 때문에 올해에만 스무 곳 이상 늘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에서는 상반기에 공장이 1∼3개월간 문을 닫았고 독일 네덜란드 체코 등 전통 강자인 유럽의 생산량은 급감했다. 밀렸던 주문이 하반기에 쏟아지며 세계 LP 시장은 공급 차질까지 빚고 있다고.
#6. 한편에서는 인공지능(AI) 작곡가, 아바타 가수의 히트가 눈앞에 다가왔다. 그들의 히트곡도 언젠가 LP 한정반으로 대량 생산돼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는 날이 올 것이다. 진정한 ‘디지로그’의 신세계, 2020년대가 점점 더 깊은 곳으로 우리 손목을 잡아끌고 있다. 판에 대한 소유욕은 인류가 지닌 숙명인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을수록 더 만지고 확인하고 싶어 하는 우리 존재가, 아직은, 육신이란 껍데기를 걸치고 있는 한….
임희윤 기자 imi@donga.com